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한반도에서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국제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통일을 이룩한 이후 조선을 침공했다. 1592년 동래성 전투를 시작으로 일본군이 조선군을 격파하며 수도 한양이 1592년 6월 함락되었다. 선조는 일본군을 피해 도주했으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임진강을 건너 1592년 7월 평양성까지 함락했다. 평양성 함락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강원도와 함경도를 침략했고, 조선 조정은 의주로 피난을 간 뒤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군은 평양성 함락 후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이는 1592년 7월 8일 이순신이 한산도 대첩에서 일본 수군 주력 부대를 격파해 해상 보급로를 장악하고, 같은 달 이치 전투에서 조선 육군이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을 지키면서 일본군의 보급에 차질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1592년 가을 조선 육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명나라군 역시 1592년 8월 조승훈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참전하였으나 평양성 공략에 실패했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지만 한양 탈환을 목적으로 진격하던 조명연합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1593년 3월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힌 이후 같은 해 5월 일본군은 한양에서 철수했다.
전황이 어느 쪽에도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과 명은 조선을 배제한채 종전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양측의 협상은 실패로 끝났고, 159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재침했다. 이전 침공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본군은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뒤 빠르게 북상했다. 그러나 직산 전투에서 명군과 충돌한 일본군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했고, 명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막아내면서 서해로의 진출 시도도 좌절되었다. 일본군은 이후 남해안에 거대한 방어망을 만들고 이 지역에 왜성을 짓고 항전했다. 조선-명 연합군은 1598년 울산성, 사천성, 왜교성 등을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이후 오대로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은 조선에 철수했고, 1598년 12월 조선-명나라 연합수군과 일본 수군이 벌인 노량 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이 끝났다.
임진왜란은 전쟁에 참여한 모든 국가에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경우 지배층의 권위가 떨어지고 신분 사회가 동요했으며 인구가 감소하였다. 일본의 경우 전쟁에 참여한 다이묘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도요토미 정권을 대신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의 경우 조선에 파병한 군대에 대한 재정적 부담이 지나치게 높아졌는데 동시에 다른 분쟁을 치르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조선과 일본은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국교를 회복했다.
명칭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혹은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웠다 하여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도 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영어권 국가들은 주로 일본의 한국 침공(영어: Japanese invasions of Korea)이라고 부른다.
배경
히데요시의 준비
1580년부터 1590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을 통일하여 평화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황실의 쇼군 임명에 필요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혈통의 적법한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황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군사력을 추구했다.1 또 다른 견해에는 히데요시가 그의 전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2 그리고 대규모의 한가해진 사무라이와 병사들, 그리고 자신을 찬탈하려 할지도 모르는 야심 찬 다이묘들에 의한 민중봉기나 반란의 위협을 완화하고 공동의 적에 맞서 새로 형성된 국가를 통합하기 위해 중국 침공을 계획했다는 것도 있다.3
수천 년 동안 중국은 동아시아의 지적,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중국 황제를 그들의 상전으로 인정하고 중국과의 무역을 허가받는 대가로 조공을 바쳤다. 중국을 침공함으로써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중심으로서 중국이 전통적으로 수행해 온 역할을 차지하려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군사력 덕분으로 돌린 비교적 미천한 출신의 인물로서 일본 내 지지를 결집했다.4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조선으로 "길을 뚫고 나가겠다"는 욕망뿐만 아니라, 필리핀과 인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5 조선 침공 기간 내내 히데요시는 중국과의 합법적인 감합 무역을 추구했기 때문이다.1 일본의 대명 합법 조공 사절단, 즉 명과의 무역 권리는 16세기 중반에 중단되었으며, 왜구라고 불리는 중일 밀수꾼-해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5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을 완료하기 훨씬 전부터 조선과의 전쟁 가능성을 계획했다. 일찍이 1578년, 주고쿠의 통제권을 두고 오다 노부나가 휘하에서 모리 데루모토와 싸우던 히데요시는 데루모토에게 노부나가의 명나라 침공 계획을 알렸다.6 1585년, 히데요시는 포르투갈인 예수회 신부인 가스파르 코엘료에게 동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히데요시는 코엘료에게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메시지를 보내 일본을 돕기 위해 해군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명나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히데요시의 요청을 거절했다.5
1591년 3월부터 규슈 다이묘들과 그들의 노동력은 오늘날의 가라쓰시에 위치한 나고야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침략군의 동원을 위한 중심지였다.7 1592년, 히데요시는 필리핀에 서신을 보내 스페인 총독에게 조공을 요구하며 일본이 이미 조선과 류큐로부터 조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8
록스타인에 따르면 군사적 준비 측면에서 무려 2,000척에 달하는 선박의 건조가 일찍이 1586년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9 조선군의 전력을 추정하기 위해 히데요시는 1587년 남해안에 26척의 공격 부대를 보냈다.10 외교 전선에서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을 완료하기 훨씬 전부터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왜구에 맞서 무역로를 단속하는 것을 도왔다.11
외교적 대립
1587년, 히데요시는 선조 재위 기간 중인 조선에 첫 번째 사절인 유타니 야스히로를 보냈다.1213 도요토미는 이를 통해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 관계를 재확립하려 했다.14 히데요시는 이를 토대로 조선 조정이 일본과 손을 잡고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를 희망했다.15 무사 출신으로 조선 관리들과 그들의 관습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던 야스히로는 조선으로부터 향후 대사 파견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데 실패했다.16
1587년, 히데요시는 요시토시의 양부이자 쓰시마섬의 다이묘인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왕조에 일본에 굴복하고 명나라 정복에 참여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라고 명령했다.12 그러나 소씨 가문은 모든 일본 선박의 조선행 단일 검문소로서 특별한 무역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조선으로부터 무려 50척의 자체 선박으로 무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17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소 가문은 조선과의 충돌을 방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고 거의 2년 동안 회담을 지연시켰다.18 히데요시가 명령을 갱신했을 때조차 소 요시토시는 조선 조정 방문을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활동으로 축소했다. 사절단 파견이 끝날 무렵, 요시토시는 선조에게 공작 한 쌍과 화승총을 선물했다.19
1590년 4월, 황윤길과 김성일을 포함한 조선 사절단이20 교토로 떠났고, 그곳에서 그들은 히데요시가 호조 씨에 대항한 오다와라 정벌을 마무리하는 동안 두 달을 기다렸다.21 그가 돌아온 후, 그들은 의례적인 선물을 교환하고 선조의 국서를 히데요시에게 전달했다.21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이 일본에 조공을 바치러 온 것이라고 잘못 가정했다. 이러한 이유로 사절단은 외교 대표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공식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결국 조선 사절단은 히데요시에게 조선 국왕에 대한 답신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사카이 항구에서 20일을 기다렸다.22 현지에서 사절단이 너무 무례하다는 이유로 재작성을 요청한 그 국서는 조선 조정에게 일본에 굴복하고 명나라와의 전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19
사절단이 돌아온 후, 조선 조정은 일본의 제안에 대해 심각하게 논의했고,23 황윤길은 일본의 군사력과 의도에 대해 상반된 추정치를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쟁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김성일은 히데요시의 국서가 허풍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조정은 일본이 여러 가문의 군대가 서로 싸우는 혼란 상태에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일본 군대의 통합된 전력과 능력을 상당히 과소평가했다. 선조를 포함한 일부는 명나라에 일본과의 거래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명나라가 조선의 충성을 의심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나 조선 조정은 결국 적절한 조치가 확실해질 때까지 더 기다리기로 결론지었다.24
결국 히데요시는 외교 협상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을 조선보다 열등한 국가로 접근했고, 조공 체제 내에서의 유리한 지위에 따라 자신들을 우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조선 조정은 히데요시의 침략 위협을 흔한 왜구 습격보다 나을 것 없다고 잘못 평가했다.25 조선 조정은 히데요시의 세 번째 사절인 시게노부26와 겐소에게 조공 체제에 도전하는 히데요시를 질책하는 선조의 국서를 전달했다. 히데요시는 또 다른 국서로 답했지만, 관습상 예상되는 외교관이 직접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27.
경과
임진왜란
1592년 음력 1월 히데요시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가도입명 : 假道入明)로 좋게 바꾸어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정명가도)
이와는 별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 용도로 병력을 최대한 징병했다. 이 징병에 응하지 않은 다이묘로는 영지의 치안을 이유로 징병을 거절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있다. 교섭이 결렬되자 히데요시는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6월 3일(음력 4월 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6월 7일(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병력도 많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 그리고 조선이 자랑하던 유일한 버팀목이 사라져 버린 셈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진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였다. 일본군이 북진해 오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분노한 백성이 궁궐과 전적을 태워버렸다.
6월 11일(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현 양평)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고 6월 26일(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하고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센고쿠 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지만, 조선군은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전무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마련하였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리던 남부 지방에서는 심히 반발하였다. 결국, 병사들이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는 급보를 듣고 탈영하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일례로 일본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의 부하 포졸인 황옥현은 탈영하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참수당하기도 했으며, 대규모 총력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당시에는 전시 계획은 있었으나 그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예컨대 대구에는 전시 계획대로 군대가 소집되었어야 했으나 일본군의 고속 돌파로 말미암아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역에 일본군이 진입하였고 백성과 수령도 뿔뿔이 도망친 뒤라서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급조한 대구읍성은 방어에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고 이일은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지도 못하고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하기도 전에 패해서 도망쳤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나라에 사신을 지속으로 보내어 구원을 계속하여 청하였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태워 버리고 노비는 자신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28
어가의 도주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 파죽지세로 북진해오자 조정은 보름 만에 한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피난했으며, 이어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퇴각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의정부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에 임명하고, 이전과 변언수(邊彦琇)를 수성좌위장(左衛將)과 경성우위장(右衛將)에29, 신각(申恪)을, 중위대장(中衛大將)에,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에 임명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도성을 방비하게 하였다. 선조는 한편으로 징병대를 구성해 징병 체찰사(徵兵體察使)에 이원익과 최흥원을 임명하고 징병대를 전국에 보내 15~60세 남성을 징집하게 했다.
송상현, 정발 등이 전사하고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도원수 신립과 부원수 김여물이 이끄는 토벌대 1만 6천명이 몰살당하고 4월 말 일본군은 경기도로 들어왔다. 이에 선조는 파천, 천도를 결정한다. 이후 일본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 오자, 선조와 백관 일행은 또다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 4월 28일 선조는 대간을 불러 파천을 상의하고, 바로 조정에서는 파천을 논의하였다. 바로 정사가 소집되고 대신들은 모두 파천을 반대하였다. 이날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혼자 울며 통곡하다가 정사가 끝난 뒤 승지 신잡(申磼)에게 과거에도 피신한 사례가 있었다며 설명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모두 이산해를 비판했다.
혼란에 빠진 선조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도승지 이항복은 의주에 가서 어가를 멈추고 있다가 만약 어려운 상태에 빠져서 힘이 다 없어지고 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된다면, 즉시 명나라 조정에 가서 사태의 위급함을 호소해야 한다면서 요동과 가까운 의주 쪽으로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30 4월 28일 선조는 이원익, 최흥원, 우부승지 신잡, 주서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만나 파천을 선언한다. 바로 광해군을 세자로 정했는데, 세자 책봉은 평양성에 도착하여 임명한다. 한편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가 올라오는가 하면 4월 29일 해풍군 이기(海豊君 李耆) 등은 궐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이에 선조는 "가지 않고 마땅히 경들과 더불어 목숨을 바칠 것이다."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천도는 결정되었고 4월 30일 궁인들을 소집한 선조는 궐문을 나섰다.
한양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선조와 백관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고 나루터를 방해하고 배 여러 척을 침몰시켰다. 선조 일행은 일본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도망쳤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당시 선조는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기는 천도를 계획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592년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는 명나라로 망명을 계획하고 사신을 보내 6월 27일 망명 허락을 명나라로부터 받았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선조는 이런 굴욕 속에서 몽진에 성공하였다.
도성의 사대부들의 계속된 환도 요청과 사헌부와 사간원이 여러 번 선조에게 돌아올 것을 요청, 1593년(선조 26) 9월 21일에 출발하여 10월 3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의주까지 가서 명나라로 피신, 망명정부를 세울 것도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의주에서 몇차례 남하하여 평양성을 거쳐서 해주까지 왔다가 다시 의주 근처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였다.
1593년 9월 20일 윤두수는 속히 환도할 것을 주청하였다. 선조는 갈팡질팡하다가 1593년(선조 26) 9월 22일 해주를 출발, 9월 23일 연안부에 도착, 2일간 머무르자는 비변사의 건의로 4일간 머무르다가 9월 27일 개성, 9월 28일 파주 동파역(東坡驛)을 거쳐 9월 29일 고양 벽제관을 거쳐 10월 1일 벽제관을 출발, 한성부 정릉동 행궁에 나타났다.
조선군의 반격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였고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로 하는 관직 제수와 우대는 기존 무과 급제를 이용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을 일으켰는데 이런 알력이 첨예화하여 폭발한 것 중 하나가 김덕령 사건이다. 한편으로 공명첩으로써 군량미를 모으고 근왕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 사대부와 백성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려고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에 명나라 장군들도 광해군을 극찬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추가로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 이양원과 합세하여 한강방어선을 막고 있었으나 4만 일본군을 막을 수 없어 모두 흩어지고 이시원 등과 함께 해유령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인 70여명의 일본군을 죽인다. 그러나 이미 조정과 이양원,김명원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한양의 정 북쪽인 양주로 후퇴했다. 그러나 임진강 방어선이 뚫리자 비변사는 신각을 적전도주자로 간주하고 참형을 선고한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신각이 적전도주자로 간주되어 사형을 내리러 망나니가 내려감과 동시에 신각의 승리가 보고 되어 조정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 망나니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려 했다. 결국 집행지까지 가서야 망나니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미 신각은 처형당한 뒤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신각의 죽음을 보고 선조의 무능함을 꼬집어 비판하기도 했다.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나라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상태로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때 명나라와 함께 조선에 파병돼 일본군과 싸운 포르투갈 용병들이 있었다. 포르투갈의 선진화된 문물을 갖춘 용병을 '해귀(海鬼)'라 불렀다. 명나라가 고용한 포르투갈의 용병들이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하고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하고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 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과 길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서산대사 휴정스님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제자 사명당 유정과 더불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스님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과 함께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군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방어하여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고, 왜란 직전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임명장을 수령받지 못해 진도군수 자격으로 한산도대첩에 참여했던 선거이가 개전 8개월만에 다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재임명되어 전라도 병력을 수습하여 방어선을 구축한 것 등이 일본군을 주춤하게 하였고 일본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였으며, 많은 인구가 사는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전라 수영이 육지에서 일본군의 내습 걱정 없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승전의 뒷 배경에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과 급습 말고도 총통이라는 훨씬 더 강력한 화력병기 및 안정적인 판옥선에 더해 거북선이라는 새로운 전투함이 조합된 '발전되고 강력한 무기체계'의 전력화가 있었다.
명군의 개입
한편,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간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 석성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일본의 의도가 명 정벌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요양부총병 조승훈은 병사 5천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송응창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에 파병한 3천여 명을 시작으로 종전할 무렵에는 10만여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명군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지만, 명나라가 개입하여 전쟁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고 평가된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오합지졸 병력 17만 5천을 모았고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했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한때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방어하던 곳으로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방어하였다. 행주대첩은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승병을 비롯한 병사들의 용맹한 활약과 화차의 활약이 매우 컸다. 특히 이 공성전에서 일본군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는 부상을 입었다. 행주산성 방어전은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이다.
강화 회담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惡疫)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9일간 치열하게 전투한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을 전사시키고 성을 함락하였으나 일본군도 피해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이로써 전란 내내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보전되었다. 전라도는 최대의 곡창지대이며 인구가 많아 반격의 발판으로 중요했다.31 또한, 일본군이 육로를 통해 전라 수영, 즉 이순신의 해군기지의 곧바로 진격하여 육지를 통해 배후를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이순신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32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유재란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히 하려고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로 말미암아 남해안 대부분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후에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직산을 끝으로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333435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 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36 제2차 울산성 전투,3738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39404142 43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중에 죽자 일본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으로 철수에는 성공하여 임진왜란은 종전하였다.
참고 자료
-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