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관 전투
1593년 음력 1월 27일 평양을 되찾고 한양으로 남진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고양 벽제관 남쪽에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패한 전투.
시작 1593년 2월 27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벽제관 전투는 1593년 음력 1월 27일(양력 2월 27일) 경기도 고양의 벽제관(碧蹄館,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 남쪽 여석령(礪石嶺, 숫돌고개) 부근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평양성 탈환 뒤 한양을 향해 서둘러 남진하던 이여송의 명군 선발대가 한양에서 북상한 일본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배경
평양을 잃은 일본군은 황해도와 개성에서 물러나 한양에 병력을 모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북쪽의 장수들을 한양으로 불러 전력을 다시 짜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을 앞세워 북쪽에서 내려오는 명군을 맞받아치기로 하였다. 이여송은 일본군이 한양을 버리고 달아난다는 보고를 믿고 주력보다 앞서 기병을 이끌고 남하하였다.
경과
- 1월 26일 무렵: 명군 선봉 사대수와 조선의 고언백이 벽제 남쪽에서 일본군 척후와 부딪쳐 이를 물리쳤다.
- 1월 27일: 이여송은 이 소식을 듣고 파주에서 기병을 이끌고 급히 벽제관으로 내려왔다. 여석령 일대에서 명군은 고바야카와·다치바나 등이 이끈 일본군 대군과 맞닥뜨렸다.
- 교전: 명군은 기병이 중심이었고 화포 부대는 뒤에 처져 있었다. 비가 온 뒤라 길이 진창이어서 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였고, 좁은 골짜기에서 일본군의 조총과 칼에 밀렸다.
- 이여송의 위기: 이여송은 포위되어 위험에 빠졌으나 부장 이유승 등이 목숨을 걸고 구해 냈다. 이유승은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 퇴각: 명군은 혜음령을 넘어 파주로 물러났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추격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려 깊이 쫓지 않았다고 위키백과는 전한다.
결과와 영향
이 패배 뒤 이여송은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물러났고, 한양 수복을 위한 공세는 멈추었다. 명은 이후 강화 교섭에 더욱 기울었다(명·일 강화 협상). 한편 명군의 남진이 멈추자 일본군은 한양 서쪽 행주산성의 권율을 공격 목표로 삼았고, 이것이 행주대첩으로 이어졌다. 일본 측은 이 싸움을 큰 승리로 기록하였으나, 『선조실록』 등 조선 기록에는 명군이 이긴 것처럼 보고된 부분도 있다.
이설
양측 병력과 사상자는 자료마다 차이가 크다. 위키백과는 연합군을 약 5,000명, 일본군을 약 2만 명으로 적는다. 명군의 전사자 수에 대한 기록도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다르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63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