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탈환
1593년 음력 1월 6~9일 이여송이 이끈 명군과 조선 관군·승군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지키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되찾은 전투.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시작~종료 1593년 2월 6일 ~ 1593년 2월 9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평양성 탈환(평양 전투)은 1593년 음력 1월 6일부터 9일까지(양력 2월 6~9일) 조명연합군이 1592년 음력 6월 이래 일본군 제1군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공격하여 되찾은 싸움이다. 명의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한 명군에 순변사 이일, 별장 김응서(김경서)의 조선 관군과 휴정(서산대사)·유정(사명대사)의 승군이 함께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을 버리고 언 대동강을 건너 한양으로 물러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싸움을 이제까지 후퇴만 하던 전세를 역전시킨 주요 계기로 평가한다.
배경
1592년 7월 조승훈의 패배 뒤 명은 심유경을 보내 고니시와 휴전 교섭을 하며 시간을 벌었다(명·일 강화 협상). 그사이 명은 영하의 반란을 진압한 이여송을 동정제독으로 삼아 대군을 편성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여송은 4만 3천여 명을 이끌고 1592년 12월 압록강을 건넜다. 평양의 고니시 군은 보급이 끊기고 겨울 추위에 시달려 병력이 크게 줄어 있었다.
경과
- 1월 6일 이른 아침: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에워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양전투」에 따르면 명군은 칠성문·보통문·함구문 세 성문 밖에 진을 쳤고, 오유충·사대수와 승군은 북쪽의 모란봉을 공격하였다.
- 1월 7일: 일본군은 모란봉 일대를 지키며 맞섰고, 밤에는 성 밖 명군 진영을 기습하기도 하였다.
- 1월 8일 총공격: 이여송과 장세작은 칠성문을, 양원은 보통문을, 조승훈·낙상지·이여백은 이일·김응서의 조선군과 함께 남쪽의 함구문을 맡아 일제히 공격하였다. 명군은 불랑기포 등 화포와 화전으로 성문과 성벽을 쳤다. 이여송은 기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물러나는 자는 베고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 50냥을 주겠다며 독려하였다. 연합군은 외성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갔다.
- 고니시의 농성: 고니시는 내성 쪽 연광정 부근의 토굴로 물러나 버텼다. 명군은 큰 피해를 입자 공격을 멈추고 퇴로를 열어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 1월 8일 밤~9일: 고니시 군은 내성에 불을 지르고 성을 빠져나가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중화·황주를 거쳐 봉산까지 물러났고, 이후 한양으로 후퇴하였다.
결과와 영향
평양을 되찾으면서 조명연합군은 평안도와 황해도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군도 고립을 피해 한양으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은 한양을 향해 남진하다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자 다시 평양으로 물러났고, 이후 명은 전투보다 강화 교섭에 무게를 두었다. 평양성 탈환 당시 명군이 조선 백성을 일본군으로 몰아 목을 베어 전공을 부풀렸다는 비판도 조선 측 기록에 남아 있다.
이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 본문은 평양성 공격 시작을 '1월 28일'로 적고 같은 사전의 전투표는 1월 8일 탈환으로 적어, 본문의 날짜는 오기로 보인다. 『선조실록』과 대부분의 자료는 1월 8일 총공격, 9일 일본군 퇴각으로 적는다. 명군의 규모는 4만 3천여 명설 외에 3만~5만 명설이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62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