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대첩
1593년 음력 2월 12일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처영의 승군 등과 함께 한강 가의 행주산성에서 3만에 이르는 일본군의 아홉 차례 공격을 물리친 전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시작 1593년 3월 14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행주대첩은 1593년 음력 2월 12일(양력 3월 14일)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幸州山城, 지금의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서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이끈 조선군이 한양의 일본군 대군을 물리친 싸움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싸움을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도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배경
이치 전투의 공으로 전라도순찰사가 된 권율은 한양 수복에 힘을 보태려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였다. 그는 수원 독산성에서 일본군을 막은 뒤, 명군과 함께 한양을 치기 위해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승장 처영(處英)이 승의병 1,000명을 이끌고 권율을 따라 강을 건넜으며, 산성에 포진한 총병력은 1만 명이 못 되었다. 일반적으로 권율의 직속 병력은 2,300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벽제관 전투에서 명군이 패해 물러나자, 한양의 일본군은 도성 가까이에 있는 권율의 군을 먼저 없애려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권율」은 일본군을 3만으로 적는다.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타 히데이에를 비롯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이시다 미쓰나리, 구로다 나가마사, 깃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부대를 나누어 이끌었다.
경과
- 준비: 권율은 산성 둘레에 목책을 두 겹으로 세우고 화차·수차석포 등 화기와 돌을 모아 두었다. 행주산성은 남쪽이 한강에 닿은 언덕으로, 정면이 좁고 경사가 급하였다.
- 2월 12일 새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오전 6시 무렵 일본군 선봉 기병 100여 기가 나타났고 뒤이어 대군이 밀려왔다. 첫 공격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었다.
- 일곱 부대, 아홉 차례 공격: 일본군은 부대를 바꾸어 가며 하루 종일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화차와 총통, 활을 쏘고 돌을 굴리며 막았다.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쓰나리 등 일본 장수 여럿이 다쳤다.
- 서북쪽 위기: 처영의 승군이 지키던 서북쪽 목책이 한때 뚫렸으나, 권율이 직접 나서 칼을 휘두르며 막아 냈다고 전한다.
- 화살 부족과 지원: 오후 들어 화살이 떨어져 갔을 때 경기수사 이빈이 화살을 실은 배를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보급하였다.
- 해 질 무렵: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시체를 불태운 뒤 한양으로 물러났다.
부녀자들이 긴 치마를 잘라 앞치마를 만들어 돌을 날랐고 여기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행주치마'라는 말은 이 싸움 이전부터 쓰인 기록이 있어 민간 어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결과와 영향
행주대첩으로 일본군은 한양 주변에서의 공세를 멈추었다. 평양 상실, 수군의 패배, 의병의 활동, 식량 부족과 전염병까지 겹친 일본군은 명과 강화 교섭에 나섰고, 음력 4월 18일 한양에서 철수하였다. 권율은 행주 싸움 뒤 파주산성으로 옮겨 방어를 이어 갔고, 이 전공으로 김명원에 이어 도원수가 되었다. 행주산성에는 1602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설
조선군 병력은 2,300명설, 1만 명 미만설 등이 있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들 사이에서도 '수천 명'과 '1만 명이 못 되었다'로 서술이 다르다. 일본군도 3만 명설이 널리 쓰이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64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