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음력 10월 5~10일 진주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로 진주성을 지켜 2만에 가까운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시작~종료 1592년 11월 8일 ~ 1592년 11월 13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는 1592년 음력 10월 5일부터 10일까지(양력 11월 8~13일) 엿새 동안 경상우도의 중심지 진주성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여 명의 조선군은 성 밖 의병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의 대공세를 막아 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싸움을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배경
진주는 경상우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자 곡창 지대를 지키는 요충지였다. 의병과 관군의 활동으로 경상우도의 일본군이 어려움을 겪자, 일본군은 진주를 점령하여 이 지역을 평정하고 전라도로 가는 길을 열고자 하였다. 김해·창원 방면에 있던 일본군은 9월 하순 창원을 점령한 뒤 진주로 향하였다. 일본군의 규모는 2만 명 안팎으로 전하며, 하세가와 히데카즈, 나가오카(호소카와) 다다오키, 기무라 시게코레 등이 이끌었다고 한다.
김시민은 판관으로 있다가 목사가 되어 성을 고치고 화약과 총통을 만들며 수성을 준비하였다. 곤양군수 이광악 등이 성에 들어와 함께 지켰다.
경과
- 10월 5일: 일본군이 진주성 동쪽에 이르러 성을 둘러쌌다. 김시민은 성안의 노약자와 부녀자에게도 남장을 시켜 군사가 많아 보이게 하였다고 전한다.
- 10월 6일~8일: 일본군은 대나무로 엮은 사다리와 높은 누대(산대)를 만들어 성벽에 붙이고 조총을 쏘며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현자총통 등 화포와 화살, 돌, 끓는 물, 짚에 불을 붙여 던지는 방법으로 맞섰다.
- 성 밖의 지원: 곽재우가 보낸 의병과 전라도에서 온 의병들이 성 밖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 10월 10일 새벽: 일본군이 동문과 북문 쪽으로 마지막 총공격을 하였다. 김시민은 앞장서 싸우다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으나, 곤양군수 이광악 등이 지휘를 이어 일본군을 물리쳤다.
- 철수: 많은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이날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결과와 영향
진주성을 지켜 냄으로써 경상우도가 보전되었고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이 다시 막혔다. 김시민은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일본군은 이 패배를 잊지 않아, 이듬해 6월 대군을 동원해 진주성을 다시 공격하였다(2차 진주성 전투). 진주 촉석루 일대의 진주성에는 김시민의 공을 기린 김시민장군전공비가 있다.
이설
양측 병력은 자료마다 다르다. 조선군 3,800여 명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수이며, 일본군은 2만 명, 3만 명 등으로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 전투표는 승리일을 10월 6일로 적고, 본문은 10월에 김시민이 승리했다고만 서술한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52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