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 해전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 수군이 순천왜성의 고니시를 구하러 노량으로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일본 함대를 크게 무찌른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 이순신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적을 쫓다가 전사하였다.
시작~종료 1598년 12월 15일 ~ 1598년 12월 16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노량 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8일 밤부터 19일(양력 12월 15~16일) 오전까지 경상도 남해도와 하동 사이의 노량(露梁) 해협과 남해도 북서쪽 관음포(觀音浦)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의 수군 도독 진린(陳璘)의 조명 연합 함대가, 순천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일본 함대를 맞아 크게 무찔렀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달아나는 일본 배를 쫓다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큰 싸움이다.
배경
음력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순천왜성의 고니시는 조명 수군에게 바닷길이 막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량해전」에 따르면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 퇴로를 요청하였고, 진린은 연락선 1척이 지나가도록 허락하였다. 이 배가 사천·남해·고성 등지의 일본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시마즈와 함께 연합 함대를 앞뒤에서 치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진린을 설득해 진형을 다시 짜고 적을 맞기로 하였다.
『선조실록』에 실린 좌의정 이덕형의 치계와 사관의 논평(선조 31년 11월 27일)에 따르면, 어느 날 저녁 일본인 넷이 배를 타고 구원을 청하러 나갔고, 이순신은 대군이 '내일쯤' 올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병력
- 일본: 『선조실록』 이덕형의 치계는 사천·남해·고성의 일본 배 300여 척이 합세하여 노량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량해전」은 500여 척으로 적는다. 시마즈 요시히로 외에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마사나리 등이 함께하였다고 한다.
- 조명 연합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00여 척으로 적는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조선 판옥선 160척·1만 명, 명 전선 300척·1만 8천 명으로 더 큰 수를 싣고 있으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경과
- 11월 18일 저녁: 일본 함대가 남해 쪽에서 노량으로 모여들었다. 연합 함대는 순천 앞바다를 떠나 노량으로 향하였다.
- 11월 18일 밤: 이분이 지은 「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삼경(三更, 23~01시) 무렵 배 위에서 손을 씻고 무릎을 꿇어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늘에 빌었다고 전한다. 『선조실록』은 명과 조선의 배가 '밤새도록' 노를 저어 노량으로 갔다고 적는다.
- 11월 19일 날 밝기 전: 연합 함대가 노량에 이르렀을 때 일본 함대도 그곳에 들어왔다(『선조실록』). 조선 수군이 곧바로 나아가 싸우고 명군이 합세하였다. 좁은 해협에서 화포와 불화살이 오가며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 진린과 등자룡: 명의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은 칠순의 노장으로 앞장서 싸우다 배에 불이 붙고 일본군이 뛰어올라 전사하였다. 진린의 배도 일본 배에 둘러싸여 위험에 빠졌으나 조선 배들이 구하였다고 전한다.
- 관음포 추격: 크게 깨진 일본 함대는 남해도 북서쪽의 관음포로 몰렸다. 관음포는 포구 안이 막혀 빠져나갈 길이 없는 곳이었다. 일본 배들은 되돌아서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 이순신 전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순신은 이날 오전 관음포로 달아나는 마지막 일본 배들을 쫓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선조실록』 사관은 이순신이 몸소 적을 쏘다가 가슴에 탄환을 맞았고, 그의 아들이 울려 하자 군사들이 놀라 동요했는데, 이문욱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덮은 뒤 북을 치며 싸움을 독려하여 군사들은 그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싸워 이겼다고 적었다. 「행록」에는 이순신이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하였고, 조카 이완이 대신 북을 쳤다고 전한다.
- 다른 전사자: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10여 명의 장수가 총탄에 맞아 죽었다(『선조실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결과와 영향
- 전과: 『선조실록』 이덕형의 치계는 일본 배 200여 척이 부서지고 불탔으며, 죽은 자가 수천 명이고, 남은 100여 척은 남해 쪽으로 달아났다고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200여 척이 불타거나 가라앉고 100여 척이 붙잡혔다고 적는다.
- 고니시의 탈출: 노량의 싸움이 벌어지는 사이 순천왜성의 고니시 군은 성을 버리고 바깥 바다로 빠져나가 남해도 남쪽을 돌아 부산으로 갔다. 고니시와 시마즈는 부산에 모였다가 곧 일본으로 돌아갔다.
- 전쟁의 끝: 노량 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11월 말까지 모두 철수하였고,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막을 내렸다. 『선조실록』 사관은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는 말이 돌았고, 그의 죽음이 전해지자 호남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였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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