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왜성 전투
1598년 음력 9월 20일부터 10월 초까지 사로병진 작전의 서로군(유정)과 수로군(진린·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키던 순천왜성(왜교성)을 수륙으로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한 전투.
시작~종료 1598년 10월 19일 ~ 1598년 11월 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순천왜성 전투(왜교성 전투)는 1598년 음력 9월 20일(양력 10월 19일)부터 10월 초까지 전라도 순천의 순천왜성에서 벌어졌다. 사로병진 작전의 일부로, 명의 제독 유정(劉綎)이 이끈 육군과 도원수 권율의 조선군이 뭍에서, 명의 수군 도독 진린(陳璘)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명 수군이 바다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수군은 여러 차례 성 앞까지 밀고 들어가 싸웠으나 육군과 손발이 맞지 않아 성을 빼앗지 못하였다.
배경
순천왜성은 1597년 말 일본군이 광양만 안쪽 신성포(지금의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언덕에 쌓은 성으로, 바다와 맞닿아 있어 배로 드나들 수 있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순천왜성」은 이곳이 일본군의 최서단 거점이었다고 본다. 고니시는 1만 3천~1만 5천 명 정도의 병력(영어 위키백과)과 많은 배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이순신은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수군을 재건하였고, 7월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이 고금도에 와서 합류하였다.
경과
- 9월 19~20일: 유정의 서로군이 성 북쪽에 진을 쳤고, 조명 수군은 성 앞바다로 나아가 장도(獐島)를 점령하고 그곳의 일본군 군량을 빼앗았다. 수군은 성 앞바다를 막아 바닷길을 끊었다. 위키백과는 장도 싸움에서 일본 배 30여 척을 깨뜨리고 11척을 붙잡았다고 적는다.
- 유정의 지연: 유정은 고니시와 강화를 논의하는 등 공격에 소극적이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유정이 거짓 강화 회담으로 고니시를 성 밖으로 끌어내려 했으나 신호 포가 너무 일찍 터져 실패했다고 전한다.
- 10월 2일(양력 10월 31일): 수륙 합동 공격이 벌어졌다. 수군은 썰물 직전까지 성 앞에 바짝 다가가 싸웠으나 육군이 제대로 호응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서 사도첨사 황세득 등이 전사하였다.
- 10월 3일(양력 11월 1일) 밤: 진린의 요청으로 수군이 밀물을 타고 밤에 공격하여 성의 일부를 부수었다. 그러나 물이 빠지면서 명군 배 여러 척이 얕은 곳에 걸렸고(영어 위키백과는 30~39척으로 적는다), 일본군이 몰려나와 이를 공격하였다. 이순신의 배들이 구하러 들어가 일부를 건져 냈다.
- 10월 초: 사천의 중로군이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수군도 고금도 쪽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순천 앞바다로 나아갔다.
결과와 영향
순천왜성 공격은 실패로 끝났으나, 조명 수군이 바닷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고니시는 바다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보내 길을 열어 달라 하였고, 진린은 연락선 1척의 통과를 허락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량해전」). 이 배가 사천·남해의 일본군에게 구원을 청하면서 노량 해전이 벌어졌다. 순천왜성은 오늘날 성곽 일부가 남아 있다.
이설
전투 기간은 한국어 위키백과가 9월 20일~10월 7일로, 영어 위키백과가 이를 양력처럼 9월 20일~11월 2일로 적어 혼란이 있다. 영어 위키백과의 10월 21일·31일, 11월 1일 등의 날짜는 양력으로 보면 『난중일기』 등에 나오는 음력 9월 22일, 10월 2일, 10월 3일과 맞는다. 병력과 사상자도 자료마다 다르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75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