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유령 전투
1592년 음력 5월 16일 부원수 신각이 함경남병사 이혼 등과 함께 양주 해유령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로, 임진왜란 중 조선 육군의 첫 승리로 꼽힌다.
시작 1592년 6월 2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해유령 전투(양주 전투)는 1592년 음력 5월 16일(양력 6월 25일)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 게너미고개)에서 부원수 신각(申恪)이 이끄는 조선군이 일본군 부대를 기습하여 격파한 싸움이다. 부산 상륙 이후 조선 육군이 거둔 첫 승리로 꼽히지만, 그 공이 조정에 알려지기 전에 신각이 처형되어 비극적인 전투로도 기억된다. 전적지는 지금의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배경
한양이 함락될 무렵 도원수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은 한강 방어를 맡았으나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 못하였다. 김명원은 임진강 쪽으로 물러났고, 신각은 유도대장 이양원을 따라 양주 산골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를 모았다. 이때 함경도에서 근왕병을 이끌고 내려온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의 군과 합세하였다.
경과
한양에 들어온 일본군 일부는 주변 고을로 나가 약탈을 일삼았다. 신각과 이혼은 일본군 부대가 양주 방면으로 나온다는 것을 알고 해유령 고개 부근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 무질서하게 고개를 넘어오던 일본군이 매복 지점에 들어오자 조선군은 사방에서 활을 쏘며 공격하여 70여 명의 목을 베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주전투」).
신각의 처형
김명원은 신각이 자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멋대로 이양원을 따라갔다고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보고를 믿은 조정은 선전관을 보내 신각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신각의 승전 장계와 일본군 수급이 도착하자 선조는 급히 처형을 멈추라는 명을 내렸으나, 두 번째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처형이 끝난 뒤였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처형일을 음력 5월 18일(양력 6월 27일)로 적는다. 신각의 처형 경위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양주전투」 항목이 김명원의 허위 보고를, 「신각」 항목이 이양원을 따라 도망쳤다는 장계를 원인으로 서술하여 강조점이 다르다.
결과와 영향
해유령 승리는 일본군도 질서 없이 움직일 때는 매복과 기습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나, 피난 중이던 조정은 길이 막혀 이 소식을 늦게 들었다. 신각을 잃은 데다 김명원에 대한 불신이 겹치면서, 이틀 뒤의 임진강 전투에서는 지휘 계통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설
날짜는 한국어 위키백과가 음력 5월 16일로 적는 반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진왜란」 전투표는 5월 18일로 적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주전투」 항목은 '5월 중순 저녁'으로만 서술한다. 위키백과는 일본군을 가토 기요마사가 보낸 선발대 70명으로 보지만, 소속 부대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43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