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김시민(金時敏, 1554년 9월 23일(음력 8월 27일)~1593년 1월 28일(음력 1592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출생~사망 1554년 ~ 1592년 11월 21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46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554년 ~ 1592년 11월 21일
- 재임
- 1592년 7월 26일~1592년 11월 21일
- 임금
- 조선 선조
- 영의정
- 최흥원
- 휘
- 시민(時敏)
- 자
- 면오(勉吾)
- 작호
- 충무공(忠武公)
- 시호
- 충무(忠武)
- 출생일
- 1554년 9월 23일(음력 8월 27일)
- 사망일
- 1593년 1월 28일(음력 1592년 12월 26일)
- 국적
- 조선
- 본관
- 구 안동 김씨
- 사당
- 경남 진주시 충민사(忠愍祠), 경남 진주시 창렬사(彰烈祠), 충북 괴산군 충민사(忠愍祠)
- 충성
- 조선
- 복무
- 조선군
- 복무기간
- 1578년~1592년
- 근무
- 부평 부사, 훈련원 판관, 진주 판관, 진주 목사, 경상우병사
- 최종계급
-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 지휘
- 경상우도 육군
- 서훈
- 선무공신 2등 추록, 상락군 추봉, 영의정 추증, 상락부원군 추봉
- 위치
- 36.8100, 127.1475
김시민(金時敏, 1554년 9월 23일(음력 8월 27일)~1593년 1월 28일(음력 1592년 12월 26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구)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셋째 아들이다
생애
1578년(선조 11)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다. 김시민이 8살이던 해(1561년), 마을 냇가에 큰 뱀이 출몰하여 마을의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일이 있어 궁리하다가 '뱀은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로 쏘아 잡는다'라는 고사를 읽고 동네 아이들과 손수 만든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훈련원 판관에 재직하던 시절 병기 및 군사 훈련을 논의하다 병조 판서와 갈등을 빚고 그 자리에서 사직했다. 오래 지나서 그는 군기시 판관이 되었는데, 당시 제조(提調)였던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그의 능력이 뛰어남을 눈여겨보고 외직으로 보임할 때마다 조정에 청해서 유임시켰다.
1583년 여진족 니탕개가 회령(會寧) 지방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토벌하였다.
임진왜란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고, 부임한 지 1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진주로 돌아와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한편으로 군사 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었다.
왜군은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진격하였다. 이에 곤양군수 이광악과 상주판관 정기룡, 의병장 이달, 곽재우 등과 합세하고, 적을 중간에서 요격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고성과 창원을 수복하였다.
이어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가서,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군을 맞아 승전하였으며, 이 공으로 1592년 진주목사로 관직을 승진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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