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량(司馬亮, ? – 원강 원년 6월 13일1(291년 7월 26일))은 서진의 황족으로 팔왕의 난의 팔왕 가운데 한 명이다. 자는 **자익(子翼)**이다. 사마의의 제3자이다2. 생모는 복귀비이다. 사마사·사마소의 이복동생이다. 사마주·사마경·사마준의 동복형이다. 사마간·사마융·사마륜의 이복형이다. 시호는 **문성왕(文成王)**이다. 무제 사마염이 죽을 때 외척 양준과 함께 다음 황제인 혜제의 보필을 맡았으나, 무제 사후 권력 독점을 노리는 양준의 뜻에 따라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후 양준이 살해되자 위관 등과 함께 다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혜제의 동생인 초왕 사마위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 대립을 이용한 황후 가남풍의 계략으로 사마위의 거병을 맞아 살해되었다.
생애
위나라 시대
사마의와 복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나라 때 산기시랑에 임명되었고, 만세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동중랑장으로 전임되었고, 작위는 광양향후로 올랐다. 감로 2년(257년), 수춘에서 제갈담의 난이 일어나자 사마량은 반란 진압을 위해 종군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실책을 저질러 면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직이 허락되어 교좌장군·산기상시·감예주제군사에 임명되었고 동시에 가절을 받았다. 이후 기양현백으로 개봉되었고 진서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무제의 시대
태시 원년(265년) 12월, 조카인 사마염(무제)이 진나라를 세우자, 사마량은 부풍왕에 봉해졌고 식읍 1만 호를 받았다. 태시 6년(270년) 6월, 선비의 독발수기능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량은 휘하의 유기·경염 등에게 진주 자사 호열의 구원을 명령하였으나, 두 사람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호열은 고립되어 전사하였다. 이 일로 사마량은 조정으로부터 책임을 추궁당해 평서장군으로 강등되었고, 유기는 참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사마량은 군사 조경과 함께 상주하여 책임은 자신의 과실에 있다며 유기의 사형을 면해 주도록 청하였으나, 무제는 이를 물리치고 사마량의 관작을 모두 박탈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무군장군에 임명되었다3.
같은 해 9월, 오나라의 서릉 독이었던 보천이 서릉성과 함께 서진에 투항하자, 무제의 명에 따라 사마량은 보천의 신병 인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인수하기 전에 서릉성이 육항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보천은 처형되었다(서릉 전투).
함녕 3년(277년) 8월, 여남왕으로 개봉되었고, 진남대장군·도독예주제군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개부가 허락되었고 가절을 받았다. 얼마 뒤 다시 중앙으로 소환되어 시중·무군대장군·후군장군·태위·녹상서사·태자태부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양준과의 대립
태강 10년(289년) 11월, 무제가 병에 쓰러지자 사마량과 외척 양준 두 사람에게 황태자 사마충의 보좌를 맡기려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양준은 사마량이 권력을 쥐어 자신의 권세가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였다. 겉으로는 아들인 사마양을 서양공에 봉하게 하는 등 대우를 중시하는 체하면서, 딸인 황후 양지와 함께 허창으로의 출진을 명하도록 획책하여 사마량을 중앙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태희 원년(290년) 4월, 사마량이 이때까지 낙양을 떠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무제는 다시 사마량과 양준에게 뒷일을 부탁하는 유조를 남겼다. 그러나 양준은 중서의 아래에서 유조를 가져가 자신의 편리에 맞게 고쳐 써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가 붕어하고 사마충(혜제)이 뒤를 잇자, 태위·태자태부·도독중외제군사·시중·녹상서사에 임명된 양준이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사마량은 무제의 부고를 듣고도 양준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장례에는 가지 않았고, 낙양성 밖에서 조의만 표한 뒤 떠났다. 이때 양준은 몰래 사마량을 죽이려고 획책하여 석감 등에게 사마량의 토벌을 명하였으나, 석감은 따르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사마량이 정위 하욱을 찾아가 대응책을 묻자, 하욱은 "어째서 자신이 살해될 것만 두려워하고, 거꾸로 양준 등을 칠 생각은 하지 않는가"라고 답하였다. 또 어떤 이는 사마량에게 병사를 이끌고 궁전에 들어가 양준을 살해하라고 권했으나, 사마량은 결국 어떤 제안도 따르지 않고 도성을 떠나 허창으로 가서 난을 피하였다.
원강 원년(291년) 1월, 혜제의 황후 가남풍은 양준의 권세를 시기하여 맹관·이조 및 환관 동맹과 함께 주살 계획을 세웠다. 또 이조를 허창에 파견하여 사마량에게 양준 토벌에 협력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사마량은 응하지 않았다. 3월, 가남풍은 혜제의 동생인 초왕 사마위와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양준과 그 삼족, 그리고 측근들을 모두 체포하여 주살하였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다
양준이 죽은 뒤, 혜제는 사마량을 태재·녹상서사에 임명하여 검을 차고 전각에 오르는 것과 입조 시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주었고, 당시 태보의 자리에 있던 위관과 함께 보정의 임무를 맡겼다. 사마량은 우선 민심을 얻고자 생각하여, 양준 토벌의 공로로 1081명을 후에 봉하였으나, 어사중승 부함은 이 봉작이 지나치다며 사마량에게 간언하였다. 또 사마량은 실권을 잡자 대부분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였으므로, 부함은 세세한 사안은 각 부서에 맡기라고 다시 간언하였고, 지나친 권세의 확대와 이에 아첨하는 세력의 증대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였으나, 사마량은 듣지 않았다. 또 조카인 동무공 사마담은 동생인 동안공 사마요와 대립하고 있었는데, 사마량에게 "동생인 동안공은 상벌을 멋대로 시행하며 조정 정치를 농단하려 하고 있습니다"라고 호소하였다. 사마량은 이를 믿고 사마요를 파면하고 대방군으로 옮기게 하였다.
사마량은 앞서 양준 일파의 배척에 참여한 사마위를 횡포하고 살인을 즐기는 인물이라 하여 몹시 꺼렸다. 그래서 위관과 협의하여 그의 병권을 빼앗고자 사마위를 북군중후에서 해임하였으나, 후임인 임해후 배해는 사마위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사직하였다. 이에 사마량은 다시 위관과 모의하여 사마위를 비롯한 여러 왕들에게 봉국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으나, 사마위는 더욱 분노하여 이 명령을 거부하였고, 같은 시기에 사마량과 위관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황후 가남풍과 결탁하여 사마량과 위관을 배제하기로 결정하였다.
최후
6월, 가남풍은 혜제에게 조서를 작성하게 하고, 사마위에게 "태재(사마량)와 태보(위관)는 이윤·곽광을 모방하여 황제 폐립을 꾀하고 있다. 왕(사마위)은 회남왕(사마윤)·장사왕(사마예)·성도왕(사마영)에게 명하여 여러 궁문을 제압하고, 사마량과 위관의 관직을 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사마위는 이에 응하여 스스로 통솔하는 북군을 움직여 사마량과 위관의 토벌을 내걸고 병사를 일으켰으며, 장사 공손굉과 적노장군 이조에게 명하여 여남왕부를 포위하게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사마량의 휘하 장하독 이룡은 병사를 일으켜 저항할 것을 권했으나, 사마량은 무력 충돌을 피하려고 이를 망설였다. 그러나 곧 성문을 오른 공손굉의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자, 사마량은 놀라 혜제의 조서가 있는지 확인하려 하였으나, 공손굉은 개의치 않고 공격하였다. 장사 유준은 사마량에게 여전히 힘으로라도 싸울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마량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체포되었다.
사마위의 휘하는 모두 사마량을 가엾게 여겨, 정오가 지나도록 아무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날은 매우 더웠으므로, 사마위의 병사들은 사마량을 수레 안에 들여 번갈아 부채질하여 식혀 줄 정도였다고 한다. 이 광경에 애가 탄 사마위는 "대숙부 여남왕 량을 베는 자에게는 비단 1000필을 주겠다"고 외쳤고, 사마위의 병사들은 북문 벽 아래에서 사마량과 세자 사마구를 살해하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뽑혔고, 코와 귀도 잘렸다고 한다. 사마량의 최후의 말은 "나의 붉은 충심(忠心)은 찢어 천하에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때에 위관 또한 붙잡혀 주살되었다.
그 뒤 가남풍은 사마위에게 권위가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독단으로 조서를 위조하여 사마량과 위관을 살해했다고 선언하고, 사마위를 주살하였다. 이로써 사마량의 명예는 회복되었고, 작위도 되돌려져 동원의 온명 제기, 관재, 조복 1습, 전 300만, 포백 300필을 하사받았으며, 장례의 예는 안평헌왕 사마부와 같은 규모로 치러졌다. 시호는 "문성"이 내려졌고, 사당 안에는 종과 경쇠의 악기가 장식되었다.
사마량의 비명횡사를 계기로 서진은 팔왕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으로 발전해 갔다. 그 자손 대부분은 사마예의 동진 건국을 따랐고(오마도강), 잇따른 정쟁으로 가문의 격은 떨어졌으나, 그 혈통을 강남에서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인물
어려서부터 민첩했으며 재간이 있었다. 또 청렴하고 공정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일화
어머니인 복부인이 가벼운 병을 앓았을 때, 사마량은 낙수에 있는 제사에 가서 액막이를 행하였다. 또 두 동생과 함께 절을 들고 북과 피리를 지니고 항상 곁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낙수 일대에서 그의 덕망이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무제는 능운대에 올라 사마량이 효행에 힘쓰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복비(복부인)가 부귀한 것은 이런 까닭이로구나"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종실
【서진 왕조 계보도】(편집)
- 『진서』 본기 권1~10, 열전 권7·8·29·44·68·69에 따름
- 굵은 글씨는 황제(추증 포함), 숫자는 즉위 순서.
- 회색 음영은 팔왕의 난에서 살해된 인물.
자녀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