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의 제2차 침입
1361년 음력 10월 반성·사유·관선생 등이 이끈 홍건적 10만여 명이 침입해 개경을 함락하자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피난했고, 이듬해 음력 1월 18일 정세운이 지휘한 고려군 20만이 개경을 탈환하였다.
시작~종료 1361년 11월 ~ 1362년 2월 13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목차
상세 타임라인
개요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부터 이듬해 음력 1월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고려 역사에서 수도 개경이 외적에게 함락된 드문 사례다. 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한 달 가까이 남쪽으로 피난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를 임시 수도로 삼았고, 그곳에서 군사를 모아 개경을 되찾았다. 그러나 승리 직후 김용의 모략으로 수복의 주역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이어졌다.
날짜 표기: 원 기록은 음력이다. 타임라인과 문서 날짜는 날짜가 전하는 경우 율리우스력 양력으로 환산했고, 본문에는 음력 날짜를 함께 적었다. 월만 전하는 사건은 대응하는 양력 달로 근사하였다.
배경
1차 침입(홍건적의 제1차 침입)에서 크게 패한 홍건적은 이후에도 해로로 서해안을 노략질했다. 만주의 홍건적 본대는 원군에게 퇴로가 막히자 다시 고려로 활로를 찾았다.
경과
침입과 청천강 방어선 붕괴
1361년 음력 10월(양력 10월 말~11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10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와 이성(泥城)을 함락하고 무주(영변)에 집결하였다. 고려는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 정당문학 김득배를 도병마사, 추밀원부사 이방실을 서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삼았다. 이여경은 개경으로 가는 길목인 절령(岊嶺, 자비령)에 목책을 세워 지켰다. 이방실은 서북면 3주 5현의 백성과 양곡을 절령 이남으로 옮기자고 건의하는 한편, 박주·개주·연주 등지에서 소규모 전투로 적에게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홍건적은 청천강을 건너 안주의 고려군을 깨뜨렸고, 김득배 등은 안주에서 크게 패해 절령으로 물러났다.
절령 돌파와 공민왕의 피난
음력 11월 11일(양력 12월 8일)경 홍건적은 절령 목책을 돌파했다(날짜는 한국어 위키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복주천도」는 11월 중순으로 적음). 안우와 이방실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해 평산 북쪽 20리의 금교역에 새 방어선을 쳤으나, 조정은 이를 지원할 힘이 없었다. 김용·안우·이방실·최영 등은 개경을 사수하자고 주장했지만, 공민왕은 피난을 결정하였다.
공민왕 일행은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개경을 떠났다. 경북매일 연재 기사가 소개한 노정에 따르면 20일 파주 분수원과 양주 영서역, 21일 광주 사평원을 지났는데, 이미 관리와 주민이 달아나 고을 원 한 사람만 왕을 맞았다고 한다. 24일 이천에서는 진눈깨비에 젖은 옷이 얼어 모닥불에 말려야 했고, 25일 충주 북쪽 음죽에 이르렀다. 이후 충주와 문경, 용궁과 예천을 거쳐 음력 12월 15일(양력 1362년 1월 11일) 복주에 도착해 이곳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성수복공신」).
개경 함락
홍건적은 금교역과 흥의역(우봉)을 거쳐 음력 11월 24일(양력 12월 21일) 개경에 들어와 궁궐을 불태우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후 약 두 달 동안 개경에 머물며 장기 점령을 준비했을 뿐 더 남쪽으로 내려오지는 않았다.
복주에서의 반격 준비
복주에 이른 공민왕은 반격을 명하는 교서를 내리고, 왕을 호종해 온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아 절월(節鉞)을 주고 모든 군사를 지휘하게 했다. 정세운은 민심을 위로하는 조서를 빨리 내리고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자고 청했다. 각 도에서 모은 병력은 20만에 이르렀고, 안우를 상원수, 김득배를 도병마사,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았다.
개경 탈환 (음력 1월 18일)
1362년 음력 1월, 정세운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개경 동쪽 교외의 천수사에 모여 개경 포위를 준비했다. 안우·이방실·김득배·황상·한방신·이여경·안우경·최영·이성계 등 여러 장수가 참전했다. 음력 1월 18일(양력 2월 13일) 새벽, 눈과 비가 내리는 틈을 타 고려군은 숭인문을 돌파해 개경에 진입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사유와 관선생 등을 포함해 10만여 명의 목을 베었고, 원 황제의 옥새 등 전리품도 거두었다. 고려군은 숭인문과 탄현문을 열어 남은 무리가 빠져나가게 했고,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달아났다.
수복 이후: 김용의 모략
총병관 자리를 정세운에게 빼앗기고 그의 공을 시기한 김용은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안우·이방실·김득배에게 정세운을 죽이라고 부추겼다. 이들이 음력 1월 정세운을 살해하자, 김용은 다시 '주장(主將)을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을 씌워 세 장수까지 죽게 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실린 교서 기록에 따르면 김득배는 음력 3월 1일(정미일, 양력 3월 27일) 산양현에서 체포되어 죽고 그 머리가 상주에 내걸렸다. 정세운은 첨의정승에 추증되었고, 안우·이방실·김득배는 1391년(공양왕 3)에 가서야 신원되었다. 김용은 1363년 흥왕사 행궁의 공민왕을 시해하려다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결과와 영향
- 공민왕은 음력 2월 25일(양력 3월 21일) 안동을 떠나 상주와 청주에 머문 뒤 1363년 음력 2월 흥왕사에 이르렀고, 흥왕사의 난을 겪은 뒤 윤3월에야 개경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개경 수복의 공으로 1등 53명, 2등 53명 등 106명이 경성수복공신에 책봉되었다. 당시 29세였던 이성계도 1등 공신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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