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전법
1391년(공양왕 3) 5월 이성계 일파가 권문세족의 사전을 혁파하고 관리에게 경기 지역 토지의 수조권을 18과로 나누어 지급하도록 정한 토지 제도로, 조선 건국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시작 1391년 5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개요
과전법(科田法)은 고려 말 토지 제도 개혁 과정에서 제정되어, 관직자에게 토지의 수조권(조세를 거둘 권리)을 나누어 주는 방식을 규정한 제도이다. 1391년(공양왕 3) 5월 도평의사사의 건의로 제정되었다(날짜는 음력). 고려 말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과전법을 만든 과정은 조선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과전법은 그대로 조선으로 계승되었다.
배경
고려 후기에는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세족이 겸병·점탈·사패 등을 통해 대규모 농장을 넓혀 갔다. 한 토지에 여러 사람이 조세를 거두는 일이 생겨 농민의 부담이 커졌고, 국가 재정은 바닥났다. 신돈의 개혁 때의 전민변정 사업처럼 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했다. 왜구로 조운이 끊기면서 관리의 녹봉과 군량조차 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개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 일파는 민생 안정과 나라 살림·군량 확보를 명분으로 토지 개혁에 착수했다.
- 1388년 7월: 조준이 처음으로 전제 개혁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 이행·황순상·조인옥·허응 등이 가세했다.
- 1389년 8월·12월: 조준이 잇따라 전제 개혁 상소를 올려, 이색·이림·우현보·변안열·권근·유백유 등 개혁 반대파와 맞섰다.
- 1390년 1월: 급전도감에서 처음으로 새 전적(토지 문서)을 나누어 주었다.
- 1390년 9월: 공양왕 때 공·사의 옛 전적을 불태웠다. 공양왕은 조종의 제도가 자기 대에 무너졌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 1391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서에 따라 과전법이 제정되었다.
내용
토지 분급
국가가 나누어 준 토지는 수조권이 개인에게 가는 사전과 공공 기관에 가는 공전으로 나뉜다.
- 사전: 관료의 과전·공신전·외관직전, 한량관의 군전, 향리·진리·역리의 외역전, 군장·잡색의 위전 등
- 공전: 군자시의 군자전, 왕실의 능침전·창고전·궁사전, 사사전·신사전 등
가장 비중이 큰 것은 과전이었다. 현직(시관)과 전직·대기(산관)를 가리지 않고 문무 관료를 18과로 나누어 최고 150결부터 차등 지급했다. 과전은 경기 지역 안의 토지로만 주었는데(사전기내의 원칙), 지방에 사전이 퍼져 세력가가 커지는 것을 막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지방의 한량관에게는 경기 밖에 군전 5결 또는 10결을 주었다.
세습 제한
과전은 원칙적으로 받은 사람 한 대에 그쳤다. 다만 죽은 관리의 아내에게 주는 수신전, 어린 자식에게 주는 휼양전을 통해 실제로는 대물림할 길이 열려 있었다.
조세 규정
경작 농민은 **전객(佃客)**으로 규정되어 토지를 묵히지 않는 한 경작권을 보장받았고, 수조권자(전주)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다. 농민은 논 1결에 조미 30두, 밭 1결에 잡곡 30두를 냈다(수확의 10분의 1). 전주는 다시 국가에 논 1결당 백미 2두, 밭 1결당 황두 2두를 세로 바쳤다. 해마다 작황을 조사해 조세를 줄여 주는 답험손실법도 두었다.
결과와 영향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신진 사대부와 이성계 세력의 경제 기반을 마련해, 이듬해 조선 건국의 토대가 되었다. 과전법이 반포된 지 1년 남짓 지나 이성계가 즉위했다. 그러나 수신전·휼양전 등으로 과전이 세습되면서 새로 줄 토지가 부족해졌고, 1466년(세조 12)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주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1470년(성종 1) 관수관급제를 거쳐 명종 무렵에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설·논쟁
- 최하 등급의 지급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과전을 "15~150결"로 적고, 위키백과는 제1과 150결부터 제18과 10결까지로 적는다. 흔히 교과서 등에서는 10~150결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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