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의 개혁
1365년 공민왕이 승려 신돈을 사부로 등용해 맡긴 개혁으로, 1366년 전민추정도감(전민변정도감)을 세워 권세가가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되돌리고 성균관을 다시 일으켰으나, 반대 세력의 공격 속에 1371년 신돈이 처형되며 끝났다.
시작~종료 1365년 ~ 1371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목차
상세 타임라인
개요
신돈(辛旽, ?~1371)은 공민왕 대에 개혁 정치를 이끈 승려로, 본명은 편조(遍照)이고 영산현 출신이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과 흥왕사의 난 등을 거치며 권문세족과 무장 세력이 강해지자,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외부 인물에게 정치를 맡겨 국면을 바꾸려 했다. 1365년부터 1371년까지 이어진 신돈 집권기에는 전민추정도감을 통한 토지·노비 개혁, 성균관 중영, 인사 제도 개편 등이 추진되었다. 이 문서와 타임라인의 날짜는 음력이다. 참고한 자료가 대부분 월 단위까지만 전하므로 양력 환산은 하지 않았다.
배경
- 사회 경제의 혼란: 원 간섭기 이래 권세가들이 남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넓히고 양인을 노비로 삼는 일이 심해졌다. 홍건적 침입으로 호적이 없어지는 등 국가의 장악력은 더 약해졌다.
- 정치 세력 구도: 홍건적 격퇴와 흥왕사의 난 진압 과정에서 최영 등 무장 세력의 발언권이 커졌고, 기존 권문세족도 여전히 강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민왕이 기존 귀족이나 무장 세력에 얽매이지 않은 인물을 찾던 중 신돈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 첫 만남: 1358년(공민왕 7) 무렵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과 처음 만났다.
전개
집권 (1365)
1365년(공민왕 14) 5월 신돈은 왕의 사부(師傅)가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직후의 일이다. 곧이어 찬성사 최영이 계림윤으로 좌천되고 무장 계열 관료들이 유배되었으며, 6월에는 김보가 수상이 되었다. 신돈은 7월 진평후에 봉해졌고, 12월에는 영도첨의사사·판중방감찰사사·취성부원군 등 최고위 직함을 받아 실권을 잡았다.
전민추정도감 설치 (1366)
1366년 5월 신돈은 가뭄 때 민심 수습을 위해 두었던 형인추정도감을 확대해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세우고 스스로 판사가 되었다. 흔히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이라 부르는 이 기구는 권세가가 빼앗은 토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이 양인임을 호소하면 풀어 주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조치가 백성의 큰 지지를 얻어, 노비들이 신돈을 '성인(聖人)'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전민변정도감은 신돈 때 처음 만들어진 기구는 아니다. 1269년 김준의 재산 처리를 위해 처음 설치된 이래 1288년, 1301년, 1352년 등 여러 차례 설치되었고, 신돈 이후에도 1381년과 1388년에 다시 두어졌다. 대개 실각한 권세가의 재산을 정리하는 목적이 강했다는 점에서, 신돈의 1366년 도감은 규모와 대중적 반향 면에서 두드러진다.
성균관 중영과 인사 개혁 (1367~1368)
1367년 5월 공민왕은 임박의 건의를 받아들여 옛 숭문관 터에 성균관(국학)을 다시 짓도록 했다. 생원 정원을 늘리고 오경사서재를 두어 유교 경전 교육을 강화했으며, 이색을 대사성으로, 정몽주·이숭인 등 젊은 학자를 교관으로 삼았다. 이들은 뒤에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중심이 되었다(정몽주 피살). 같은 해 8월에는 관직 없는 산관(散官)도 서울로 올라와 근무하게 했고, 1368년 12월에는 근무 연한에 따라 승진시키는 순자격제를 도입해 청탁을 막으려 했다.
반발과 몰락 (1366~1371)
반대는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366년 4월 정추와 이존오가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고, 1367년 10월과 1368년 10월에는 신돈 제거 모의가 잇달아 발각되었다. 1369년 2월 신돈이 오도도사심관 자리까지 겸하려 하자 공민왕이 이를 거절했다. 1369년 무렵부터는 왜구 침입(고려 말 왜구 침입), 노국공주 영전 공사에 따른 부역, 기근이 겹쳐 민심이 나빠졌다. 1370년 5월에는 명 황제의 조서가 승려의 정치 관여를 경계했고, 같은 해 10월 공민왕이 직접 정사를 보겠다고 선언(친정)하면서 신돈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1371년(공민왕 20) 7월 신돈은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로 수원에 유배되었고, 이틀 뒤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이춘부 등 측근 약 60명도 함께 제거되었다.
평가
『고려사』는 신돈을 반역 열전에 넣고 '요승(妖僧)', '노호(老狐)' 등으로 깎아내렸다. 그러나 이는 개혁으로 이익을 잃은 지배층의 시각이며, 사후에 부정적 서술이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조선 건국 세력은 우왕·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우창비왕설'과 '폐가입진론'을 내세워 공양왕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신돈의 부정적 이미지가 더욱 굳어졌다. 반면 당대 백성들은 그를 성인, 신승(神僧), 문수보살의 화신으로까지 불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의 개혁이 사회 경제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개혁은 신돈 개인의 권력에 크게 의존했기에 그의 실각과 함께 전민변정도감의 업무도 판도사 등으로 넘어가 흐지부지되었고, 토지 문제의 근본 해결은 고려 말 논의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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