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위총의 난
1174년(명종 4) 서경유수 조위총이 정중부·이의방 등 무신 집권자를 치겠다며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으로, 절령 이북 40여 성이 호응했으나 1176년 서경이 함락되며 진압되었다.
시작~종료 1174년 9월 ~ 1176년 6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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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위총의 난은 1174년(명종 4)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맞서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약 3년 동안 이어졌으며 한때 개경 가까이까지 위협했지만, 1176년 음력 6월 서경이 함락되고 조위총이 참수되면서 끝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무신정권기 최대 규모의 반무신 저항으로 다룬다. (이 문서의 날짜는 음력이다.)
배경
1173년 김보당의 난이 실패하면서 폐위된 의종이 경주에서 시해되었고, 문신들이 대거 살육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조위총은 이의방이 의종을 죽이고도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죄를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무신정권에 대한 위기의식과 함께, 북방 지역 사회에 쌓여 있던 폐단도 거병의 배경으로 꼽힌다. 그의 일차 목표는 정중부·이의방 등 집권 무신의 우두머리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전개
거병과 초기 우세 (1174년)
『고려사절요』 명종 4년 가을 9월 기사에 따르면 조위총은 동계·북계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렸고,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했다. 다만 연주(延州)의 현덕수·현담윤 부자는 끝까지 따르지 않고 서경군을 물리쳐 반란군의 큰 걸림돌이 되었다.
조정은 평장사 윤인첨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정부군은 절령에서 폭풍과 폭설 속에 크게 패했다. 반란군은 개경 근처까지 진출했고, 포위될 뻔한 윤인첨은 정균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동계에서는 김박승·조관이 화주영을 공격했는데, 낭장 이거가 문을 열어 주어 병마사 이의와 병마부사 최균이 전사했다.
이의방의 반격과 죽음
이의방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서 반란군을 격파했다. 최숙이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고, 정부군은 대동강까지 추격해 서경성 밖에 진을 쳤다. 그러나 날이 추워 철수했다. 1174년 음력 11월 조정은 윤인첨을 원수,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다시 서경을 칠 준비를 했다. 이 무렵 정중부의 아들 정균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이 이의방을 살해해, 정권은 정중부에게 넘어갔다. 명종은 유응규와 사정유를 조위총에게 보내 항복을 권했다.
연주 함락과 서경 포위 (1175년)
윤인첨은 먼저 연주를 공격하기로 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명종이 다시 조서를 보냈고, 조위총은 항복을 청했다가 번복했다. 결국 두경승이 연주를 함락했다. 1175년 음력 6월 윤인첨은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포위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
궁지에 몰린 조위총은 김존심과 조규를 금나라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그러나 김존심은 도중에 조규를 죽이고 고려 조정에 투항했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을 금나라에 보냈으나 금은 원병을 거절하고 서언을 고려로 돌려보냈다.
서경 함락 (1176년)
1176년(명종 6) 음력 6월, 윤인첨이 통양문을, 두경승이 대동문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했다. 조위총은 사로잡혀 참수되었고, 그 무리 10여 명이 갇혔다.
결과와 영향
조위총이 제거된 뒤에도 저항은 이어졌다. 1177년 서경 함락 때 도망한 장정들이 다시 봉기해 1년 반 동안 버텼고, 1179년에도 서북면병마사 이부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조위총의 난 이후의 저항이 일반 백성 중심으로 바뀌어 갔다고 평가한다.
이 난은 무신정권 내부 권력 구도에도 영향을 주었다. 진압 과정에서 이의방이 제거되어 정중부가 실권을 쥐었고, 토벌에 공을 세운 이의민·두경승 같은 무신이 출세했다. 같은 시기 남쪽에서 일어난 망이·망소이의 난에 조정이 회유책으로 대응한 것도 서경 전선에 힘을 쏟아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167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