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당의 난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정중부·이의방을 치고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동계에서 일으킨 거병으로, 실패한 뒤 의종이 경주에서 시해되고 문신이 대거 살육되었다.
시작~종료 1173년 8월 ~ 1173년 10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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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김보당의 난은 1173년(명종 3) 음력 8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金甫當)이 동계(東界)에서 일으킨 반무신 거병이다. 그해가 계사년이어서 계사의 난이라고도 한다. 김보당은 무신정변의 주동자 정중부·이의방을 토벌하고 폐위된 의종을 다시 왕으로 세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의종이 경주에서 시해되었고, 정변 때 살아남은 문신들까지 대거 죽임을 당했다. (이 문서의 날짜는 음력이다.)
배경
1170년 무신정변 뒤 김보당은 정4품 공부시랑과 간의대부에 임명되었다. 그는 간의대부로서 동북면병마사로 나가 있었다. 동북면(동계)은 지금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북부에 걸친 국경 지대로, 병마사가 군사와 행정을 함께 맡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무신정변에 소극적으로 대처했던 문신 계열이 이의방 등의 일방적인 정국 운영에 반발한 것이 거병의 주된 원인이라고 본다.
전개
김보당은 병마녹사 이경직, 장순석 등과 모의한 뒤 1173년 음력 8월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동생 김지당을 비롯해 그와 개인적인 인맥으로 얽힌 사람과 의종 때 내시를 지낸 사람들이 가담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유인준·배윤재·한언국 등이 합류했다고 적는다.
김보당은 장순석·유인준 등을 남쪽으로 보냈다. 이들은 거제에 유배(부처)되어 있던 의종을 모시고 나와 경주로 옮겼다. 옛 지배 체제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의종 복위의 명분은 다른 문신이나 일반 백성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무신정권은 곧바로 반격했다. 이의방은 이의민과 박존위를 경주로 보냈고, 장순석 등은 패해 붙잡혀 죽었다. 김보당도 붙잡혀 죽었는데, 죽기 전에 '문신으로서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빌미로 무신들은 정변 때 화를 면했던 문신들까지 대거 학살했다.
의종 시해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해 겨울 음력 10월, 정중부 등은 이의민을 시켜 경주에서 전왕 의종을 죽이게 했다. 이의민은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끌어내어 맨손으로 등뼈를 꺾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신은 요에 싸여 연못에 던져졌고, 뒤에 호장 필인 등이 관을 갖추어 물가에 묻었다. 이의민은 이 공으로 대장군에 올랐다. 시해 날짜를 음력 10월 1일로 적는 자료도 있다.
결과와 영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부」 항목에 따르면, 문신 살육이 이어지자 낭장 김부가 정중부에게 문신과 무신 가문 사이의 혼인을 건의해 살육이 그쳤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문신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무신 집권 체제는 오히려 굳어졌다. 의종을 죽인 이의민은 이후 출세를 거듭해 1184년 최고 집권자가 되었다. 의종의 비참한 죽음과 장례 문제는 이듬해 서경유수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조위총의 난).
김보당의 난은 무신정권 아래에서 문신 계열이 일으킨 대표적인 반무신란으로 평가된다. 실패의 원인으로는 의종 복위라는 목표가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 꼽힌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166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