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변
1170년(의종 24) 음력 8월 30일, 정중부·이의방·이고 등 무신들이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호종 문신들을 죽이고 개경을 장악해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세운 정변이다.
시작~종료 1170년 10월 11일 ~ 1170년 10월 14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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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무신정변(武臣政變)은 1170년(의종 24) 음력 8월 30일(양력 10월 11일), 대장군 정중부와 견룡군 장교 이의방·이고 등이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틈타 일으킨 정변이다. 경인년에 일어나 경인의 난, 주동자의 이름을 따 정중부의 난이라고도 한다. 무신들은 보현원과 개경에서 문신과 환관을 대거 죽이고, 의종을 거제로 내쫓은 뒤 의종의 아우 익양공 왕호를 국왕(명종)으로 세웠다. 이후 약 100년 동안 무신이 실권을 쥐는 무신정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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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고려 전기에는 문신이 재상직을 독점했고 무신은 정3품 상장군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전쟁에서도 문신이 지휘관이 되는 일이 많았다. 하급 군인들은 공사에 동원되었고 군인전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문신의 무신 모욕도 잦았다. 인종 때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나례(儺禮) 행사에서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운 일은 잘 알려져 있다. 1167년(의종 21)에는 의종 근처에 화살이 떨어진 일을 두고 김돈중이 견룡군과 순검군을 탓해 많은 무관이 처벌받았다.
의종은 정사를 멀리하고 문신들과 함께 이궁(離宮)과 사찰을 돌며 잔치를 즐겼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170년 음력 5월 의종이 화평재에 행차했을 때 이의방과 이고가 정중부에게 불만을 털어놓으며 거사 모의가 시작되었다.
전개
흥왕사에서의 결정 (음력 8월 29일)
의종은 음력 8월 연복정과 흥왕사를 돌며 놀이를 이어 갔다. 음력 8월 29일(양력 10월 10일) 일행이 흥왕사에 이르렀을 때, 정중부는 이고·이의방에게 '왕이 곧바로 환궁하면 참고, 보현원으로 옮겨 가면 거사하자'고 말했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현원사건」은 정중부·이의방·이고가 흥왕사에서 문신 살해를 모의했다고 정리한다.
오병수박희와 이소응 사건 (음력 8월 30일)
이튿날 의종은 보현원으로 향했다. 보현원은 개경 동남쪽 장단 방면에 있던 원(院)으로, 사찰이면서 숙박 기능을 겸한 곳으로 보인다. 도중에 의종은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시켰다. 나이 많은 대장군 이소응이 상대를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자, 젊은 문신 기거주 한뢰가 그의 뺨을 쳐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다. 의종과 문신들은 이를 보고 웃었다. 이 일이 무신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보현원의 학살
일행이 보현원에 다가가자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가서 순검군을 모아 두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중부의 난」에 따르면 이들은 '우리는 오른쪽 소매를 빼고 복두를 벗을 것이니, 그렇지 않은 자는 모두 죽여라'라고 약속했다. 의종이 문 안으로 들어가고 문신들이 물러나려 할 때 이들은 승선 임종식과 지어사대사 이복기를 문에서 죽였다. 한뢰는 의종의 침상 밑에 숨었다가 끌려 나와 죽었다. 이 밖에 승선 이세통, 내시 이당주, 어사잡단 김기신, 지후 유익겸, 사천감 김자기, 태사령 허자단 등이 살해되었다. 시신은 의종이 만든 연못에 버려졌는데, 이 연못을 뒤에 '조정침(朝廷沈)'이라 불렀다고 한다. 정중부에게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준 김돈중은 감악산으로 달아났다가 하인의 밀고로 붙잡혀 죽었다. 무가 출신으로 무신과 사이가 좋았던 승선 노영순은 죽음을 면했다.
개경 장악과 문신 살육
무신들은 이어 개경으로 몰려가 문신을 죽였다. 이때 '문관(文冠)을 쓴 자는 서리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는 구호가 나왔다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개경에서 중요 문신 50여 명이 더 학살되었다고 적는다. 다만 같은 항목은 문종 때 중앙 문관 정원이 532명, 이속이 1,165명이었던 데 비해 이때 죽은 문신은 100명 정도였다고 보아, 문신이 모두 없어지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대장군 진준은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문신 네댓 명뿐'이라며 무고한 살육을 말렸고, 직언으로 이름난 문극겸도 죽음을 면했다.
의종의 환궁과 폐위 (음력 9월 1~3일)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의종은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12일) 포시(15~17시)에 개경 궁궐의 강안전으로 돌아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중부의 난」은 정변 당일 밤 무신들이 왕을 데리고 개경으로 돌아왔다고 적어 시점에 약간 차이가 있다. 내시 왕광취 등이 반격을 꾀했으나 한숙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죽임을 당했다. 이고와 채원이 왕까지 죽이려 했으나 양숙이 말렸다. 의종은 무신들을 달래려고 상장군에게 수사공복야를 더하고 대장군을 상장군으로 올리는 등 벼슬을 내렸지만 소용없었다. 의종은 수문전과 군기감으로 옮겨졌고, 태자는 영은관에 갇혔다.
거사 사흘째인 음력 9월 2일(양력 10월 13일)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현으로, 태자를 진도현으로 내쫓았고 태손은 죽였다. 음력 9월 3일(양력 10월 14일) 의종의 아우 익양공 왕호가 즉위했으니 이가 명종이다. 명종은 정중부·이의방·이고를 벽상공신에 봉하고 대사면을 내렸다.
결과
정변 이후 무신들은 의종의 재산과 죽은 문신들의 집을 차지했다. 명종은 허수아비에 가까웠고, 실권은 정중부·이의방·이고와 무신 회의 기구인 중방이 쥐었다. 그러나 주동자들 사이의 다툼은 곧바로 시작되어 이고는 이의방에게, 이의방은 정중부 측에게 제거되었다. 문신 측의 반격으로 1173년 김보당의 난이 일어났고, 그 결과 거제에 있던 의종은 경주에서 시해되었다. 1174년에는 서경에서 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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