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돈(王敦, 266년 - 324년)은 중국의 오호십육국 시대의 군인이다. 자는 처중(处仲)이다. 본관은 낭야군 임기현이다. 낭야왕 사마예(후의 원제)를 옹립하고, 사촌 동생인 왕도와 함께 동진을 건국하였다. 무예가 뛰어나고 인망이 있었으며, 계략에 풍부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서예가 왕희지는 그의 종질이다. 아버지는 왕기이다. 형은 왕함이다. 조카(왕함의 아들)로는 왕유1와 후에 양자가 되는 왕응 등이 있다. 아내는 사마염의 딸 양성공주이다.
생애
젊은 시절
용모가 단정하고 눈매가 특이했다. 학문은 『춘추좌씨전』에 통달하였고, 재산에 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청담을 즐겼다. 아직 무명이던 때부터 왕도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여겼다.
서진의 혜제 시대, 무제의 딸 양성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도위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태자사인이 되었다. 당시 왕개와 석숭이 사치를 다투고 있었는데, 왕돈도 연회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왕개의 연회에서는 시녀들이 손님들에게 술을 권했다. 손님이 술을 거절하면 왕개는 즉시 시녀를 죽였다. 왕도는 술을 못 마셨으나 시녀의 목숨이 걸려 있었기에 억지로 술을 다 마셨지만, 왕돈은 일부러 거절하였다. 또 석숭의 연회에서는 석숭이 변소에 늘 십여 명의 여자 시종을 대기시켜 두고, 손님의 갈아입을 옷을 마련하여 시중을 들게 하였다. 손님 대부분은 변소에서 옷을 벗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나, 왕돈은 태연하게 접대를 받았다. 이러한 태도를 보고 왕도는 "처중(왕돈)이 세상에 나서면 마음속에 강직함과 잔인함을 품고 있어 천수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했고, 석숭의 시종들은 "이 손님은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팔왕의 난으로 황태자 사마준이 폐위되어 허창으로 추방되게 되자, 왕돈은 강통 등과 함께 금령을 어기고 배웅하며 절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 세상 여론은 이 행동을 칭찬하였다.
사마륜이 황제를 찬탈하고 사마경 등이 반사마륜 세력으로 거병하자, 왕돈은 숙부인 연주자사 왕언에게 호응하도록 권하였다. 혜제가 황제 자리에 복귀하자 산기상시·좌위장군·대홍려·시중으로 승진하였고, 지방으로 나가 광무장군·청주자사가 되었다.
실력자가 되다
팔왕의 난에서 승리한 사마월이 실권을 장악하자, 낙양으로 다시 불려 와 중서감이 되었다. 이미 유연 등의 독립으로 화북은 어지러워진 상태였다(영가의 난). 그는 아내 공주의 시녀와 노비, 금은보화 등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레 한 대만 가지고 상경하였다. 사마월에 의해 양주자사에 임명되어 강동 지역에 들어갔다. 사마월의 측근인 반도는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반대하였으나, 사마월은 그대로 부임하게 하였다. 그 뒤 상서로서 낙양으로 불려 갔으나 응하지 않았다.
팔왕의 난을 피한 사마예가 왕도의 헌책에 따라 건업으로 옮겼을 때, 왕돈은 부름을 받아 그의 휘하가 되었다. 건흥 3년(315년)에는 도독 강양형상교광육주제군사·강주 자사 및 한안후가 되었다. 얼마 뒤 서진의 민제가 유요에게 사로잡히자, 진왕이 된 사마예에 의해 대장군 지위를 받아 군사 전권을 장악하였다.
반란
영창 원년(322년), 동진에 반란을 일으켜 무창에서 거병하였다. 명분은 동진의 황제가 된 원제의 측근이던 유은과 조협 등을 주살하는 것이었으나, 왕도가 그들을 중용한 원제에게 멀리 밀려난 것도 이유였다. 왕돈은 석두성을 수비하던 원제의 부하 주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관군에 대해 대승리를 거두었다. 종질인 왕윤지는 왕돈 등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입막음을 위해 살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입에 손가락을 넣어 일부러 토해 내고 병자를 가장하여 화를 면했다고 한다. 사태를 중대하게 여긴 원제는 왕돈에게 함께 천하를 다스려 나갈 것을 맹세하였다. 왕돈도 이에 응하여 승상이 되었고, 조협·대연·주의·감탁 등 적대한 자들을 살해하였다. 같은 해 안에 원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명제로 즉위하였다.
최후
태녕 2년(324년), 왕돈은 병에 쓰러졌다. 왕돈에게는 자식이 없어, 형 왕함의 아들인 왕응을 후계자로 삼아 무위장군에 임명하게 하였다. 측근인 전봉이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자, 어린 왕응으로는 "비상한 일(은밀히 동진을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가리킴)"이 불가능하므로, 자신이 죽으면 무장을 해제하고 조정에 귀순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전봉·심충 등은 왕돈이 하책이라 한 재차의 거병을 기도하였다. 명제는 왕돈의 병을 듣고 문병 사자를 보냈으나, 실제로는 토벌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2.
왕돈은 명제의 측근인 온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온교는 오히려 명제에게 왕돈이 다시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6월, 명제로부터 전횡이 극에 달했다는 탄핵을 받았고, 왕돈을 정벌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보다 정확하게는, 거짓으로 왕돈이 죽었다고 칭하고, 일당인 전봉 등의 정벌을 명령하였다. 이는 왕돈이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왕돈은 전봉 등에게 끌려가는 형태로 다시 동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온교를 간신이라고 규탄하고, 온교 토벌을 명목으로 삼았다.
이때 기실(서기)인 곽박이 점술에 능했기에, 즉시 길흉을 점치게 하였다3. 기실은 "성공하지 못하십니다"라고 답하였다. 왕돈은 곽박이 온교나 유량과 친하여 거짓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라 의심하였고, 거듭 자신의 수명을 묻자 "일을 일으키시면 머지않아 화를 당하시겠지만, 움직이지 않으시면 장수하실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왕돈은 격노하며 "너의 수명은 어떠하냐?"라고 물었고, 곽박이 "오늘로 끝납니다"라고 답하자 그를 참살하였다. 전봉 등이 "천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묻자, "(명제는) 남교(황제 즉위 의식)를 치르지 않았으니, 천자를 칭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대들은 동해왕(사마충)과 배비(사마충의 의붓어머니이자 사마월의 미망인)를 보호하면 된다"라며 명제의 폐위와 사마충의 옹립을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중병의 왕돈을 대신하여 왕함이 군의 원수로 출진하였고, 태녕 2년(324년) 7월에 건강에 육박하였으나4 월성에서 패배하였다.
왕돈은 패보를 듣고 "형은 늙은 하녀처럼 쓸모가 없구나"라고 말하며 스스로 진두에 서려 하였으나, 얼마 못 가 기력이 다해 쓰러졌고, 59세로 사망하였다4. 왕돈 사후 왕함·왕응 등 잔당도 모두 평정되었고4, 왕돈의 시신은 명제의 명령으로 무덤에서 파헤쳐져 무릎을 꿇린 상태로 참수되고 효수되었다(왕돈의 난). 시신을 거두어 가는 자는 없었으나, 극감의 진언으로 유족에게 장례가 허락되었다.
일족인 왕도는 정치 무대로 복귀하였고, 도간·유량·극감도 실력자로 대두하였다.
참고 문헌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