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통일
936년 음력 9월 고려 태조가 8만 7천여 명의 대군으로 일선군 일리천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황산에서 항복을 받아 후삼국을 통일한 사건이다.
시작 936년 9월 26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후삼국 통일은 936년(고려 태조 19) 고려가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이어 황산(지금의 충청남도 논산 연산)에서 신검의 항복을 받아 후삼국을 하나로 합친 사건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두 군대는 음력 9월 갑오일(8일, 양력 환산 9월 26일)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으며, 고려군은 마군 4만·보군 2만 3천·번병 기병 9천 5백 등 총 8만 7천 5백 명으로 후삼국 시대 최대 규모였다. 이로써 900년 무렵부터 이어진 후삼국의 분열이 끝났다.
배경
후백제의 내분
930년 고창 전투와 934년 운주 전투에서 잇달아 패한 후백제는 주도권을 잃었다. 935년 음력 3월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이찬 능환, 아우 양검·용검과 모의하여 아버지를 김제 금산사에 가두고, 견훤이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넷째 아들 금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견훤은 6월 금산사를 탈출해 나주로 달아난 뒤 고려에 투항하였고, 태조는 그를 상보로 높여 남궁에 머물게 하였다. 같은 해 말 신라의 경순왕의 귀부로 고려는 후백제만을 상대하게 되었다.
출정
936년 2월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가 고려에 내응하겠다고 알려 왔다. 6월 견훤은 "늙은 신이 멀리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교화에 귀순한 것은 위엄을 빌려 역적 자식을 베고자 함"이라며 출병을 청하였다. 태조는 처음에는 때를 기다리려 했으나 그 간청을 받아들여, 먼저 태자 왕무(뒤의 혜종)와 장군 박술희에게 보병·기병 1만을 주어 천안부로 보냈다. 천안부는 후백제군이 북상하는 길목을 막는 거점이었다. 9월 태조는 3군을 이끌고 천안부에서 합류한 뒤 일선군으로 진군하였고, 신검도 군사를 이끌고 맞섰다.
전개
고려군의 편성
『고려사』 태조 19년 9월 조는 고려군의 편성을 자세히 전한다.
- 좌강: 견훤과 대상 견권·박술희·황보금산, 원윤 강유영 등이 마군 1만을, 지천군 대장군 능달·기언·한순명·흔악 등이 보군 1만을 거느렸다.
- 우강: 대상 김철·홍유·박수경, 원보 연주, 원윤 훤량 등이 마군 1만을, 보천군 대장군 삼순·준량 등이 보군 1만을 거느렸다.
- 중군: 명주 대광 왕순식, 대상 긍준·왕렴·왕예 등이 마군 2만을, 대상 유금필 등이 흑수·달고·철륵 등 북방 여러 종족의 날랜 기병 9,500을 거느렸고, 우천군·천무군·간천군이 보군 각 1천을 거느렸다.
- 원병: 대장군 공훤 등이 기병 300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700을 거느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고려사』에 이름이 오른 장수가 38명에 이른다고 설명하며, 이 정도 대규모 동원은 견훤이 청한 '역적 자식의 응징'을 넘어 후백제 자체의 멸망을 목표로 한 것이라고 본다.
일리천의 결전
9월 8일 두 군대는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고, 태조는 견훤과 함께 군세를 살폈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나아가자 『고려사』는 칼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군 위에서 일어나 적진으로 향했다고 적는다. 군세가 매우 큰 것을 본 후백제 좌장군 효봉·덕술·애술·명길 네 사람은 투구를 벗고 창을 던진 채 견훤의 말 앞에 와서 항복하였고, 후백제군은 기가 꺾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가 신검의 위치를 묻자 효봉 등은 "중군에 있으니 좌우에서 협공하면 반드시 깨뜨릴 수 있다"고 답하였다.
태조는 대장군 공훤에게 후백제 중군을 곧바로 치게 하고 3군이 일제히 나아가 공격하니 후백제군이 크게 무너졌다. 고려군은 장군 흔강·견달·은술·금식·우봉 등 3,200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고려사』는 후백제군이 창을 거꾸로 하여 서로 공격했다고 적어, 진영이 내분으로 무너졌음을 보여 준다.
황산의 항복
고려군은 황산군까지 추격하여 탄령을 넘어 마성에 진을 쳤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신검이 김천에서 추풍령을 넘어 영동·금산을 거쳐 논산에서 전열을 가다듬으려 했다고 본다. 그러나 더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신검은 아우인 청주(菁州)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탄령은 완주 운주면, 대전 동쪽 마도령, 금산 진산면 숯고개 등 여러 곳으로 비정된다.
결과
- 태조는 포로로 잡은 후백제 장병 3,200명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흔강·부달·우봉·견달 등 40명만 처자와 함께 개경으로 보냈다.
- 아버지를 가두고 신검을 세운 능환은 처형하고, 양검·용검은 진주로 유배했다가 곧 죽였다. 신검은 남의 협박으로 왕위에 올랐고 스스로 항복했다 하여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았다. 다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후 신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그도 곧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 견훤은 근심과 울분으로 등창이 나 며칠 뒤 황산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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