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멸망
925년 말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가 직접 이끈 원정군이 부여부를 함락하고 발해 수도 홀한성(상경)을 포위하여, 926년 정월 대인선의 항복으로 약 230년 이어진 발해가 멸망한 사건.
시작 926년 2월 28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발해 멸망은 926년 정월 거란(요)의 태조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수도 홀한성(상경 용천부)을 포위하여 마지막 왕 대인선의 항복을 받은 사건이다. 거란군이 출정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수도가 무너져, 698년 건국 이래 약 230년간 이어진 발해는 막을 내렸다.
이 문서의 날짜는 『요사』 본기의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원래 날짜는 925년 음력 12월 16일 원정 선포, 윤12월 29일 부여부 포위, 926년 음력 정월 3일 부여부 함락, 9일 홀한성 포위, 12일 항복 요청, 14일 정식 항복이다.
배경
거란의 성장
요서 북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난 거란은 야율아보기가 907년 대가한, 916년 황제를 칭하며 급속히 팽창하였다. 거란은 908년 요하 하구로 보이는 진동해구에 장성을 쌓아 요동 진출을 시작했고, 919년에는 옛 요양성을 고쳐 동평군으로 삼아 발해 공격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발해는 924년 거란의 요주를 공격해 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주민을 잡아가는 등 맞섰다.
발해의 외교와 내분
대인선은 신라 등과 은밀히 결원을 맺고, 후량·일본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며 여진 등과 연계하여 거란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후삼국으로 갈라진 신라는 도울 형편이 못 되었다. 『요사』에는 발해 멸망 직후의 논공행상에 신라가 들어 있어, 신라가 거란 편에 섰거나 적어도 결원을 지키지 않고 관망했다는 해석이 있다.
내부 사정도 좋지 않았다. 『요사』는 거란이 발해 사람들의 "이심(離心)"을 틈타 움직였다고 적었다. 발해의 지배를 받던 보로국·흑수·달고 등이 이탈해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려에 투항하고 중원 왕조에 조공하는 일이 918~925년에 집중되었다. 925년 9월 6일과 10일, 12월 29일(모두 음력)에는 예부경·공부경·사정 등 고관과 왕족 성씨를 가진 인물들이 500명, 100호, 1천 호 규모의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전개
925년 9월 서방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야율아보기는 12월 16일 조서를 내려 발해 공격을 선포하고 황후, 황태자 야율배, 대원수 야율요골(뒤의 태종)을 거느리고 친정에 나섰다. 원정에는 회골·신라·토번·당항·실위·사타·오고 등도 상징적으로 참여했다고 『요사』는 전한다. 거란은 윤12월 4일 목엽산에 제사하고, 14일 오산에서 푸른 소와 흰 말로 천지에 제사하며 군대를 사열하였다. 21일 살갈산에서 귀전(鬼箭)을 쏘아 출정을 알렸고, 그해 마지막 날인 29일 상령에 이르러 밤에 발해의 서쪽 요충인 부여부(지금의 지린성 눙안 일대)를 포위하였다. 9일 만에 천여 리를 행군한 셈이다.
926년 정월 3일 부여부가 포위 만 3일 만에 함락되었다. 부여부는 늘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을 막던 곳이었기에, 신편한국사는 이처럼 쉽게 무너진 데에 발해 내부의 문제가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거란은 이어 노상이 이끄는 발해군 3만을 격파하였다. 황태자 야율배가 기세를 몰아 수도를 치면 반드시 이긴다고 주장했고, 거란군은 6일 뒤인 정월 9일 홀한성을 포위하였다. 주력군을 잃은 대인선은 12일 항복을 청하고, 14일 정식으로 항복하였다.
위키백과가 인용한 『요사』 계열 기록에 따르면 대인선이 항복한 뒤 거란군이 성에 들어가자 발해 사람들이 다시 저항해, 야율아보기가 직접 지휘하여 성을 다시 함락시켰다고 한다.
결과
- 거란은 발해 땅에 동단국(동란국)을 세우고 황태자 야율배를 왕으로 삼아 상경을 천복성이라 고쳐 불렀다. 뒤에 동단국의 도읍은 요양으로 옮겨졌다.
- 상경은 함락되었으나 지방은 곧바로 복속되지 않았다. 926년 8월까지 막힐부·안변부·현덕부·정리부·남해부·장령부 등에서 공격과 반란 진압이 이어졌다.
- 대인선은 7월 야율아보기가 회군할 때 왕후와 함께 끌려가 거란 상경 임황부 서쪽에 성을 쌓고 살게 되었다. 거란은 그에게 오로고, 왕후에게 아리지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요사』 국어해는 이것이 항복을 받을 때 야율아보기 부부가 탄 말의 이름이었다고 전한다.
- 발해 유민들은 후발해, 정안국 등을 세워 부흥 운동을 벌였고, 많은 이들이 고려로 넘어왔다. 934년에는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그에게 왕계라는 이름을 내려 우대하였다.
이설·논쟁
남아 있는 기록만 보면 발해는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멸망 원인으로 내분설, 지배층의 사치와 기강 해이, 백두산 화산 폭발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인선」 항목은 최근 연구에서 대인선이 일찍부터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요사』와 『요동행부지』 등을 통해 요동의 패권을 두고 수십 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였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한다. 백두산 대분화는 연대 측정 결과 발해 멸망 이후로 보는 견해가 많아 직접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135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