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전투
927년 신라 왕경을 습격해 경애왕을 죽게 한 견훤의 후백제군이 돌아가는 길에, 이를 막으려던 고려 태조의 정예 기병 5천을 공산 동수(지금의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크게 깨뜨린 전투로, 신숭겸·김락이 전사하고 태조는 겨우 몸을 피했다.
시작 927년 9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상세 타임라인
개요
공산 전투(공산 동수 전투)는 927년(고려 태조 10, 신라 경애왕 4)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일대인 공산 동수(桐藪)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대가 고려 태조 왕건의 군대를 크게 깨뜨린 전투이다. 신라 왕경을 짓밟고 돌아가던 견훤을 태조가 직접 기병 5천을 이끌고 막으려 했으나, 오히려 포위당해 신숭겸·김락 등 장수들이 전사하고 태조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승리로 후백제는 한동안 후삼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 문서의 날짜는 음력이다. 『고려사』는 이 일련의 사건을 태조 10년 9월 조에 한꺼번에 적었다(음력 9월은 양력 환산 9월 말~10월 하순).
배경
고려와 후백제는 925년 조물성 대치 끝에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하였다. 그러나 926년 고려에 볼모로 와 있던 견훤의 조카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은 고려의 볼모 왕신을 죽이고 화친을 깼다. 927년 정월 태조는 후백제의 용주(예천 용궁)를 쳐서 항복받았는데, 이때 신라 경애왕이 군사를 내어 고려를 도왔다. 이어 고려는 운주, 근품성, 강주, 대량성 등을 차례로 공략하였다. 신라가 고려 쪽으로 기울자 견훤은 신라를 직접 치기로 하였다.
전개
신라 왕경 습격
927년 9월 견훤은 근품성(지금의 문경 산북)을 공격해 불사르고, 신라의 고울부(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여 왕경 근교까지 육박하였다. 경애왕은 연식을 보내 고려에 급히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신라와 우리는 오랫동안 좋게 지냈으니 위급한 때 구하지 않을 수 없다"며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 등에게 군사 1만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원군이 이르기 전에 견훤은 갑자기 신라 도성에 쳐들어갔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애왕은 왕비·종척과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벌이다 적병이 들이닥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왕과 왕비는 성 남쪽 이궁으로 달아나 숨었으나 붙잡혔고, 견훤은 왕을 군중에 끌어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견훤은 왕의 이종 아우 김부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경순왕이다. 이어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 등을 포로로 삼고, 백성의 자녀와 공인, 병기와 보물을 거두어 돌아갔다.
공산 동수의 결전
소식을 들은 태조는 크게 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몸소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에서 돌아가는 견훤을 맞아 싸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동수를 지금의 동화사 일대로 설명하고, 위키백과는 지묘동 일대로 본다. 전투는 고려에 불리하게 전개되어 후백제군이 태조를 겹겹이 에워쌌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껏 싸우다 전사하고, 고려군은 무너져 달아났으며,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후대 전승에 따르면 신숭겸은 태조와 옷을 바꿔 입고 적을 유인하다 죽었고, 후백제군이 그의 시신을 태조로 알고 머리를 베어 갔다고 한다. 대구에는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반야월 등 이 전투와 관련된 지명 전승이 남아 있다. 이들 이야기는 정사에 보이지 않는 전승이다.
결과
- 견훤은 승세를 타고 대목군(지금의 칠곡 약목)을 빼앗아 들판의 곡식을 모두 불태웠고, 10월과 11월에는 벽진군(지금의 성주)을 침공하였다. 11월 벽진군 싸움에서 고려 정조 색상이 전사하였다.
- 같은 해 12월 견훤은 태조에게 국서를 보내 "활을 평양의 누각에 걸고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마시게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 928년 견훤은 대야성 일대와 강주(진주)를 장악해 고려의 남해안 활동을 막았고, 929년 7월 의성부를 쳐서 성주 홍술을 전사시키며 고창(안동)까지 압박하였다.
영향과 의의
공산 전투는 고려가 겪은 가장 큰 패배로, 이후 양국의 표면적 화친은 완전히 깨지고 전면전이 이어졌다. 한편 견훤이 경애왕을 죽게 한 일은 신라와 각지 호족의 반감을 사, 결국 3년 뒤 고창 전투에서 지방 호족들이 고려 편에 서는 원인이 되었다. 태조는 신숭겸을 기려 그가 전사한 자리에 지묘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설
『고려사』는 견훤의 신라 왕경 습격과 공산 전투를 모두 태조 10년 9월 조에 적었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견훤이 왕경을 습격한 시점을 경애왕 4년 겨울 11월로 적어 시기에 차이가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 r143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