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 전투
1894년 5월 11일(음력 4월 7일) 새벽, 동학 농민군이 정읍 황토재에서 전라 감영군을 기습해 크게 이긴 전투. 농민군이 관군과 처음 맞서 거둔 승리로 봉기의 기세를 크게 올렸다.
시작 1894년 5월 11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황토현 전투는 동학 농민 운동 1차 봉기 때인 1894년 음력 4월 7일(양력 5월 11일) 새벽,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고부와 정읍 사이의 황토재(현 정읍시 덕천면 일대)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파한 전투이다. 농민군이 관군과 벌인 첫 본격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봉기는 전라도 전역으로 번졌다.
배경
음력 3월 20일 무장에서 봉기한 4,000여 명의 농민군은 태인 접주 최경선의 300여 명, 말목장터의 농민 수백 명과 합세해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했다. 이들은 4일 동안 머물며 화약고를 불태우는 등 폐정을 바로잡은 뒤 3월 25일경 백산으로 옮겼다. 백산은 높이 50m도 안 되는 언덕이지만 주변 곡창 지대를 내려다보는 요지였다. 여기에 인근 고을의 농민군이 모여들자, 농민군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김개남을 총관령으로 추대하고 「사대명의」와 격문을 발표했다. 이어 4월 1일 태인, 4월 4일 부안 관아를 점령했다(날짜는 음력).
전라 감사 김문현은 이 소식을 조정에 알리는 한편, 1893년 설치된 무남영의 영관 이경호에게 무남영 군대와 각 읍의 포군을 거느리고 금구 대로로 나가 농민군을 막게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무남영병 700여 명과 보부상 중심의 향병 600여 명이 원평·태인을 거쳐 백산 부근까지 나아갔다.
전개
부안 관아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강화한 농민군 1만여 명은 감영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 향하던 길을 바꾸어 부안과 고부 경계의 성황산에 진을 쳤다.
- 음력 4월 6일: 두 군대는 태인 용산 화호나루 부근에서 처음 맞붙었다. 농민군은 거짓으로 패한 척 물러나 고부 매교로 후퇴했고, 감영군이 뒤쫓자 다시 패한 척하며 황토재로 올라갔다. 감영군도 황토재 인근에 진을 쳤고, 대치 속에 날이 저물었다.
- 음력 4월 7일 새벽: 황토재 마루에 몸을 숨기고 있던 농민군이 고개 아래 감영군 진영을 향해 포를 쏘며 기습했다. 허를 찔린 감영군은 혼란에 빠져 무너졌고, 농민군은 이를 뒤쫓아 영관 이경호 등을 죽였다.
결과
- 관군 사상자는 1,000여 명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과장된 것으로 보고 200여 명 정도로 추정한다.
- 승리한 농민군은 정읍을 거쳐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 등 남쪽 고을을 차례로 점령했다. 이는 서울에서 내려온 홍계훈의 경군을 남쪽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어, 뒤이은 황룡촌 전투와 전주성 점령으로 이어졌다.
- 황토현 전투는 농민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고 관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봉기의 전개에 큰 영향을 주었다.
기념
전투지 일대는 '정읍 황토현 전적'으로 사적에 지정되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전봉준 동상 등이 들어서 있다. 정부는 2019년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26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