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 점령
1894년 5월 31일(음력 4월 27일)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감영 소재지인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 사건. 이를 계기로 정부가 청에 원병을 요청하고 일본군도 출병해 청일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작~종료 1894년 5월 31일 ~ 1894년 6월 11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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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전주성 점령은 동학 농민 운동 1차 봉기의 정점으로, 1894년 음력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봉준의 농민군이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성에 싸움 없이 들어간 사건이다. 전주는 조선 왕실의 본향(경기전·조경묘가 있는 곳)이자 전라도 행정의 중심이었으므로, 그 함락은 조정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개
황룡촌 전투에서 이긴 농민군은 홍계훈의 경군 본대가 남쪽에 머무는 사이 정읍·태인·원평을 거쳐 빠르게 북상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농민군이 전주성에 다가오자 전라 감사 김문현과 판관 민영승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농민군은 저항 없이 성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서문 쪽에서 장날 인파에 섞여 들어갔다고 전한다.
뒤쫓아 온 홍계훈의 경군은 양력 6월 1일 전주성 밖에 도착해 완산 일대에 진을 치고 성을 포위했다. 경군은 성 밖 고지에서 성안으로 포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경기전 등이 위협받았다. 농민군은 양력 6월 4일과 6일 두 차례 성 밖으로 나가 공격했으나 화력에 밀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 무렵 김순명 등 농민군 지도자들이 전사했고, 전봉준도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청·일 출병
전주 함락 보고를 받은 정부는 자력으로 진압하기 어렵다고 보고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이홍장은 6월 6일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 출병을 통보하고, 섭지초(예즈차오)가 이끄는 2,800명(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일전쟁」)을 충청도 아산으로 보냈다. 일본 역시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의 혼성 여단을 파견해 6월 9일 인천에 상륙시켰다.
결과
외국 군대가 들어오자 정부와 농민군 모두 사태를 빨리 수습할 필요가 생겼다. 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조건으로 정부와 화약을 맺고 6월 11일(음력 5월 8일) 무렵 전주성에서 물러났다(전주 화약). 농민군이 전주를 점령한 기간은 약 열흘이었다.
의의
전주성 점령은 농민군이 지방 관아 점령 단계를 넘어 한 도의 수부를 장악한 사건이었다. 동시에 청·일 양국에 출병의 빌미를 주어 청일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28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