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 봉기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전봉준이 이끄는 고부 농민들이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고부 관아를 점령한 사건. 동학 농민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시작 1894년 2월 1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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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부 봉기(고부 민란)는 1894년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5일) 전라도 고부군(현 전북 정읍시 고부면 일대)의 농민들이 동학 접주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 관아를 습격·점령한 사건이다. 단순한 지방 민란으로 끝날 수도 있었으나, 정부가 보낸 안핵사의 강압적 처리로 사태가 커지면서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배경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갖가지 명목으로 농민을 수탈했다. 대표적인 것이 만석보 사건이다. 동진강 상류에는 이미 보가 있었는데도 조병갑은 그 아래에 새 보를 쌓게 하면서 농민들을 동원하고, 완공 뒤에는 물세(수세)를 걷었다. 위키백과는 상답 한 마지기에 2말, 하답에 1말을 거두었다고 전한다. 또 불효·음행 같은 죄목을 씌워 재물을 빼앗고,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며 돈을 걷기도 했다.
농민들은 두 차례 군청에 진정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3년 음력 11월 전봉준 등 20여 명은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둥글게 이름을 적은 사발통문을 작성해 봉기를 결의했다. 사발통문에는 고부성 점령, 조병갑 처단, 군기창·화약고 점령, 전주 감영 함락 후 서울로 진격한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전개
음력 1월 10일 새벽, 말목장터에 모인 1,000여 명의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조병갑은 미리 빠져나가 전주로 달아났다. 농민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불법으로 거둔 세곡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만석보를 허물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음력 1월 14일 무렵에는 모인 사람이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농민들은 이후 백산 등지로 옮겨 진을 쳤다.
정부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박원명을 새 군수로 임명했으며,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했다. 신임 군수 박원명의 회유로 농민들은 음력 3월 중순 무렵 대부분 해산했다. 그러나 이용태는 봉기 참여자를 동학도로 몰아 체포·처벌하고 재산을 빼앗는 등 강경하게 처리했다.
결과와 영향
안핵사의 탄압은 농민들의 분노에 다시 불을 붙였다. 전봉준은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등과 손잡고 양력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무장에서 다시 봉기했다(무장 기포). 고부 봉기는 이렇게 지역 민란에서 전라도 전역의 농민 전쟁으로 확대되는 첫 단계가 되었다.
이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학운동」 항목은 고부 관아 습격일을 '2월 10일'로 적는 등 음력·양력이 섞여 있다. 이 문서는 음력 1월 10일(양력 2월 15일)을 따른다.
- 봉기 참여 인원은 자료에 따라 수백 명에서 1,000여 명까지 다르게 전한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25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