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암 (고려)
이암(李嵒,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출생 1297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46
문서 정보
- 출생
- 1297년
- 본명
- 이군해
- 출생
- 1297년
- 사망
- 1364년
- 성별
- 남성
- 국적
- 고려
- 경력
- 승문원 학사, 판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진현관 대제학
- 직업
- 문신, 서예가, 시인, 화가
- 종교
- 불교
이암(李嵒, 1297년 ~ 1364년)은 고려 말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호는 행촌(杏村),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행촌이란 호는 자신이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을 따서 지었다. 원래 이름은 이군해(李君侅), 자는 익지(翼之)이며 후에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생애
그는 고려 고종 때 문과에 합력하여 승문원 학사를 지낸 진(瑨)의 증손자이며, 고려국 판밀직사사 감찰대부(高麗國 判密直司事監察大夫), 문한(文翰)학사,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한 존비(尊庇)의 손자로,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 부사를 지낸 철원군(鐵原君) 우(瑀)의 장남이다. 도촌(桃村) 이교(李嶠)가 그의 동생이고,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는 숙부이다.12 이들의 가문은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누대공신재상지종(累代功臣宰相之種) 문벌가였으며, 조선 개창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후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와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관과 무관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명족이 되었다.
이암은 백이정(白頤正, 1247년∼1323년) 문하에서 수학하며 당시 최고 서체로 추앙받던 조맹부의 송설체를 터득하여 13세에 명필이 되었다. 2년 후 이 소식을 들은 원나라의 무종(武宗)이 이암에게 불교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써서 바치라고 명하자 이암은 10첩을 써서 보냈다. 무종이 ‘천하일필(天下一筆)’이라 칭찬하고 1첩을 돌려주었다. 현재 그 연화경의 반쪽이 후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근래에 일제 강점기 반출 문화재 환수 등 사회적 관심에 따라 그의 글씨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활발해지고 있다. 이암은 서예가로서뿐만 아니라 시와 그림에도 뛰어났다.
그와 그의 집안은 불교와도 관련이 많아서 숙부는 어릴 때 출가하여 왕사(王師)를 지내고 국사로 추증된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이며,12 막내동생도 출가하여 장성의 백암사(白巖寺)에 머물렀던 운암(雲菴) ()징([]澄) 청수(淸叟)이다.3456 백암사(白巖寺)는 정토사(淨土寺)라고도 했으며 오늘날의 백양사(白羊寺)인데, 행촌과 그의 숙부 각진국사가 발원하여 중창한 원찰(願刹)이었다고 하며, 그의 동생 청수(淸叟)에 이어 조선 초까지도 손자대의 중호(中皓), 외증손 송은 몽(松隱 蒙) 등 그의 자손 중에 출가한 사람들이 절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노승과도 친하여 그가 주석하던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의 경내에 해운당(海雲堂)을 짓고 머물며 왕래하기도 했다. 과도 친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 "향 피우고 불경을 베끼는(焚香寫佛經)" 그의 생활이 부럽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가 1363~1364년간에 사경(寫經)한 이 일본과 후손가에 남아 있다. 이는 그가 《》 중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시기인 1363년에 실제로는 방대한 80권의 을 사경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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