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
이강(李綱)은 중국 남송의 재상이다. 자는 백기(伯紀)이다. 수주 화정현 사람이다. 상주 무석현 출신이다. 본관은 소무군 소무현이다.
출생~사망 1085년 ~ 1140년마지막 수정 2026. 10. 16. 오후 4:27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1085년 ~ 1140년
이강(이강, 원풍 6년 윤6월 10일(1083년 7월 27일) - 소흥 10년 1월 15일(1140년 2월 5일))은 중국 남송의 재상이다. 자는 백기(伯紀)이다. 수주 화정현 사람이다. 상주 무석현 출신이다. 본관은 소무군 소무현이다.
약력
정화 2년(1112년)에 진사가 되었다. 정화 7년(1117년)에 금이 침략해 왔을 때 「어융오책」을 올려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선화 7년(1125년)에 금군이 개봉에 이르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휘종의 퇴위와 황태자(흠종)의 즉위를 건의하였다. 휘종은 같은 건의를 하고 있던 채유(채경의 아들)와 함께 양위 공작을 실현하라고 명하였다. 채유는 우민과 함께 양위를 실현하였고, 이강이 양위의 조서를 작성했다고 전해진다.12
즉위한 흠종은 이강의 건의를 받아들여 병부시랑에 임명하였다. 정강 원년(1126년)에 금의 장수 올리부가 개봉을 포위하자, 동경유수를 명받고 방어에 힘썼다. 금인이 제시한 화의에 극력 반대하였으나 재상의 용납을 받지 못하였다. 화의가 맺어진 뒤에도 금인이 주변을 계속 침략하고 노략질을 그만두지 않는 것을 보고, 황제에게 청하여 근왕의 뜻을 가진 한인들을 규합하고 전비를 갖추어 회복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용맹만 앞세워 명령을 어기고 적을 습격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이강은 그 책임을 지고 사직하였다. 그런데 군민의 상소가 수만 건에 달하여 다시 불려 들어와 상서우승으로 복귀하였고, 이어 지추밀원사가 되었다. 태원의 포위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동북선무사에 임명되어 송군을 통솔하려 했으나, 도중에 조서로 중지되었다. 이후 양주 지주로 좌천되었고, "전쟁 논의를 좌우하여 병력을 잃고 재물을 낭비한 죄"를 추궁당하여 영강군으로 유배되었다. 금인이 다시 침략해 오고, 화의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황제가 이강을 다시 기용하려 하였으나, 그가 호남의 근왕군을 이끌고 진군하던 중 개봉이 함락되고 말았다.
남송의 고종이 즉위하자, 상서우복야·중서시랑에 발탁되어 국정에 참여하였고, 먼저 「십사」를 올려 시대의 폐단을 논하였다. 고종은 이를 채택하였다. 고종이 한때 허락했던 장방창을 이강은 강력하게 물리쳤다. 한편 각 방면에 조서를 내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들의 유족을 구제하게 하였고, 하북초무사·하동경제사를 설치하였다. 이강이 추천한 장소와 부량을 이에 임명하여 양하(兩河)의 방비를 굳건히 하였다. 또한 군의 편성을 고치고 군벌을 엄격히 하여 군기를 밝혔으며, 수레 제도를 정비하고 전함을 만들어 수군을 모집하였다. 더 나아가 무신 가운데 유능한 자를 발탁하고, 모병·매마·모민의 세 가지 상주를 올려 병비의 충실에 힘썼다. 상서좌복야·문하시랑으로 옮겼으나, 이때 상서우복야·중서시랑이던 황잠선이 이강의 정책을 방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장준의 탄핵을 받아 재상직에서 물러나 관문전대학사가 되었다. 이강이 기획한 군정은 모두 폐지되었고, 양하의 경영은 좌절되어 그 주현들이 잇따라 상실되었다. 소흥 2년(1132년)에 호광선무사 겸 담주 지주로 복귀하였고, 형호 지역에서 창궐하던 유적을 토벌하여 치안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간관의 탄핵으로 다시 낙직되었다. 소흥 5년(1135년)에는 황제의 물음에 응하여 고금의 대계와 나라를 지키는 대계를 논하였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져 강서안무제치대사·홍주 지주가 되었다. 역경이 배반하여 유예에게 항복하자, 그 책임을 지고 장준이 재상직을 사직하려 하였을 때, 상언하여 장준이 사직하지 않도록 간청하였다. 소흥 9년(1139년)에 형호남로안무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고, 소흥 10년(1140년)에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사(少師)가 추증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늘 정론을 굳게 지키며 흔들리지 않았다. 여러 차례 좌천되고 낙직되었으나 명성은 사방에 퍼졌다. 송의 사신이 금나라에 갈 때면, 금인은 반드시 이강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저작
경사(經史)에 깊이 통달하였다. 『역전』 30권, 『논어상설』 10권, 『정강전신록』 3권, 『건염시정기』 3권, 『건염진퇴지』 4권, 『봉영록』, 『선무형광기』, 『제치강우록』 등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양계집』 170권이 있으며, 그중 66권은 표·차·주의 종류로 시정을 논한 것이 많다. 『제로론』에서는 화친을 맺는 것도 정벌을 주로 하는 것도 완전한 책략이 아님을 논하였다. 『어융론』에서 용병의 좋은 방책과 자치의 중요한 방법을 궁구한 것은, 송대 유학자의 정명론 가운데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재론』에서는 바다에서 소금을 굽고, 산에서 채취하며, 동전을 주조하는 적극책과, 영선·화석·제조·역역·사백을 억제하는 소극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당시 일반 경세가들이 단지 쓸모없는 관원을 줄이는 데 그쳤던 것과 달리, 사실에 입각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를 배척하는 논의가 들끓고 있을 때 쓴 『삼교론』에서는, 유교·도교·불교 어느 쪽의 주장도 부당하지 않음을 밝히고 그 조화를 꾀하였다.
주석
Foot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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