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항을 떠나 격포로 가던 110톤급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정원(221명)을 크게 넘긴 362명을 태우고 악천후 속에 회항하다 임수도 부근에서 뒤집혀 292명이 숨진 사고이다.
시작~종료 1993년 10월 10일 ~ 1993년 11월 2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12:04
상세 타임라인
개요
1993년 10월 10일(일요일) 오전,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파장금항을 떠나 변산반도의 격포항으로 향하던 군산 서해훼리 소속 110톤급 철선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출항 30분쯤 뒤 임수도 부근 해상에서 높은 파도를 맞고 뒤집혀 침몰했다. 배에는 정원 221명(승무원 14명 포함)을 141명이나 넘긴 362명이 타고 있었고, 이 가운데 292명이 숨지고 70명이 구조되었다. 1970년 남영호 침몰 사고(323명 사망) 이후 가장 큰 여객선 참사였다.
배경
서해훼리호는 1990년 군산의 조선소에서 건조된 길이 약 34m, 폭 6m의 소형 여객선으로, 1992년 10월부터 위도~격포 항로를 하루 한 차례 왕복했다. 위도 주민에게는 뭍으로 나가는 거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운항 횟수에 견주어 승객이 많았고, 국고 보조금이 끊긴 영세 선사였으며, 선장이 선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사고 당일은 휴일이어서 바다낚시객과 위도에서 열린 장례에 다녀가는 사람들이 몰렸다. 표를 배 안에서 팔았기 때문에 정확한 승선자 명단이 없었다.
경과
서해훼리호는 오전 9시 40분께 파장금항을 출발했다. 당시 사고 해역에는 초속 10~14m의 바람이 불었고, 파도 높이는 2~3m(영어 위키백과) 또는 4~5m(사고 직후 서울신문 보도)로 전해진다. 규정상 출항이 금지될 정도의 기상은 아니었으나 승무원들은 출항을 꺼렸고, 일부 승객이 출항을 요구했다는 주장도 있다. 오전 10시 10분께 임수도 부근에서 돌풍과 파도가 거세지자 배는 위도로 되돌아가려고 뱃머리를 돌렸는데, 이때 옆에서 큰 파도를 맞아 오른쪽으로 기울며 순식간에 전복·침몰했다. 당시 보도는 배가 가라앉는 데 10초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구명정 9개 가운데 정상 작동한 것은 2개뿐이었다.
구조와 수습
인근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조난을 알리고 40여 명을 먼저 건져 냈다. 해경 함정·헬기·어선을 동원한 본격 수색은 약 1시간 뒤에야 시작되었고, 그날 밤 10시까지 70명이 구조되고 시신 51구가 인양되었다. 당초 실종자는 140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나 시신 인양이 이어지며 희생자 수가 크게 늘었다. 승객 파악이 부실했던 대책본부와 해경의 늦은 초기 대응이 함께 비판받았다.
선장은 사고 직후 살아서 섬에 숨었다는 소문이 돌아 경찰이 주민을 탐문하기까지 했으나, 10월 15일 선장·기관장·갑판장의 시신이 배 안 통신실에서 발견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선체는 15m 바다 밑 개펄에 박혀 있었다. 10월 17일 인양 도중 연결한 줄이 끊어져 선체가 다시 가라앉았고, 10월 27일 다시 인양되었다. 11월 2일 마지막 실종자가 확인되면서 희생자는 292명으로 확정되었다.
원인
해양 전문가 합동조사반은 12월 1일 선박 구조에는 문제가 없고 정원 초과와 과적(화물 약 16톤)이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12월 13일 전주지검은 초과 승선, 과적, 운항 부주의, 갑판 배수구(방수구) 부족을 원인으로 들었다. 갑판에 들이친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복원력을 잃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영어 위키백과는 조업용 밧줄이 양쪽 추진축에 감겨 있었다는 내용을 함께 적고 있으나, 이것이 공식 원인으로 인정되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한편 이 배는 국정감사 과정에서 해운항만청의 여객선 안전관리 평가에서 만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점검이 형식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책임과 사후 처리
정부는 교통부 장관, 해운항만청장, 군산지방해운항만청장을 경질했고, 관계 공무원 38명을 문책했으며 해운조합 이사장도 물러났다.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은 이 사고를 '후진국형 인재'라고 질타했고, 여객선 승선 보고가 대부분 형식적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언론은 정원 초과 상태의 악천후 운항을 '자살 운항'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보상은 사망자 1인당 9,910만 원으로 합의되었다. 총 보상액 약 282억 원 가운데 선사가 낼 수 있는 돈은 10억 원, 해운공제조합 몫이 73억 원에 그쳐, 나머지는 국민 성금(93억 원)과 재해 의연금으로 메웠다. 영세 선사의 책임 능력 부족이 공적 재원으로 메워진 셈이었다.
영향과 의의
사고 뒤 여객선 승선 인원 점검과 승선 명부 작성이 강조되었으나, 이듬해 충주호 유람선 화재 사고 당시에도 승선 명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올 만큼 현장 변화는 더뎠다. 정원 초과, 형식적 안전 점검, 영세 선사, 늦은 초기 구조라는 문제는 21년 뒤 세월호 침몰 사고에서 다시 드러나, 두 사고는 한국 해양 안전 문제의 연속선 위에서 함께 거론된다. 위도면 진리에는 사고 해역을 바라보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해마다 10월 10일 위령제가 열린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12:04 · r3512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