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北元, ᠤᠮᠠᠷᠳᠤ ᠶᠤᠸᠠᠨ ᠤᠯᠤᠰ, 1368년 ~ 1635년)은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고원의 초원지대로 돌아간 이후의 원나라를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이후로도 원나라의 국호였던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중세 몽골어: ᠳᠠ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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ᠤᠯᠤᠰ 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하였으나 1388년 이후로 잠시동안 "몽골(蒙古)"이라는 명칭이 다시 사용되었으며,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마흔과 넷(四十四万蒙古, 중세 몽골어: ᠳᠥᠴᠢᠨ ᠳᠥᠷᠪᠡᠨ 도친 두르븡)이라고 칭했다.123 중국에서는 당시의 북원을 "타타르(중국어: 韃靼 달단[*])"라고 불렀다.
1368년 원 순제(토곤 테무르)는 대도(大都)가 함락되자, 이를 버리고 만리장성 북쪽의 상도(上都)로 패주했다.45 이때까지만 해도 원나라는 여전히 대다수의 지역들(산서, 영북, 요양, 감숙, 섬서, 운남)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때 명나라와 북원의 대치는 중국 역사상 또 하나의 남북조 시대라고 일컫을 수 있다.67
14세기 말이 되자 북원은 완전히 중국에서 축출되었다. 이미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고, 내부의 몽골 제부족들을 통제하기 어렵기도 하여 더이상 남하할 여력이 없어진 북원은 이후에도 번번히 중국 변경을 약탈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1370년에 토곤 테무르가 응창에서 훙거하자, 그의 아들인 원 소종(元 昭宗)과 그 동생 천원제(天元帝)는 내몽골에서 더욱 북진하여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로도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원의 땅을 회복하려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하였다. 원나라 최후의 명장 코케 테무르가 사망하고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퇴하고, 1388년 부이르 누르의 동북 방면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토구스 테무르는 투울 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이수데르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정주성을 상실하고 완전히 다시 유목민화된 북원은, 이전 중원 왕조의 잔존 세력으로써가 아니라 단순히 유목민들의 정치 체제집단으로 변모하였다.
천원제 사후에 몽골은 동부의 타타르부(韃靼)와 서부의 오이라트부(瓦剌, 오이라트 연맹)으로 분열되었고, 올량합(兀良哈)나 하미(哈密) 등의 다른 부족들도 명나라에 차례차례 복속하였다. 그뒤로 오이라트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정통 3년에 이르면 오이라트 수령 토곤이 타이순 칸을 살해하고 몽골 제부족들을 일시적으로 통일하였으며, 토곤의 아들 에센은 명나라에 침입하여 황제를 사로잡는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1455년에 암살당한 뒤로 오이라트의 세력도 쇠미하였고, 그뒤로는 계속해서 분열이 반복되다가 15세기 말이 되자 타타르부의 다얀 칸이 몽골을 재통일했다. 그는 6투멘이라는 이름으로 몽골 지역을 나눈 뒤에 이를 자신의 아들들과 친척들에게 각각 분봉하여 대칸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계속해서 반항하던 오이라트에 정벌 원정을 감행하고 중국 변경에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등 몽골에 중흥기를 가져왔다.
다얀 칸 사후 몽골은 내부 분열로 인해 급격히 쇠퇴하여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고, 최후의 위대한 군주였던 링단 칸마저 1632년에 후금의 홍타이지에게 패한 뒤로는 완전히 쇠락하였다. 마침내 숭정 8년 (1635년 6월 12일), 링단 칸의 아들이자 마지막 대칸이었던 에제이 칸이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몽골 제국에서부터 내려오던 북원의 430년 역사가 끝을 맺었다.
국호
1368년 이후의 몽골 정권에는, 이 문서의 명칭이자 공식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북원(北元)'을 포함하여 다양한 영칭이 있으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며, 또한 중세의 몽골사를 다루는 역사학자들의 논저에서는 '북원'이라는 명칭이 자주 등장함에도 볼구하고 이 개념의 사용 범위를 구분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마저도 서로 의견이 분분한데, 쟁점은 '북원'의 점주를 1368년부터 천원제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이 시해당한 1388년까지 20년간의 몽골로 보느냐, 혹은 이후에 몽골 제부족들이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복속하기 직전인 1635년까지 268년간의 몽골로 보느냐는 것이다.8
이 문제에 대하여 중국 역사가들은 일찍부터 깊이 토론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그들은 '북원'은 천원제 토구스테무르가 패망한 1388년까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 후의 몽골 정권에 대해서는 원나라와 관련한 국호가 아니라 단순히 '몽골'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였다.910 원나라 국호의 폐기는 몽골 정권이 중원 쟁탈을 포기하고 몽골 지역 자체에 입각했다는 의의를 가진다.11
따라서 '북원'은 1368년 이후 몽골 정권의 한 단계만을 가르키는 용어로 보아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천원제 토구스테무르가 패망한 이후 몽골 사료에서 원나라 국호의 사용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12
- 원나라의 전통적인 제호, 시호, 연호 등이 천원제 토구스테무르의 사후에는 사용되지 않고 사라졌다.131415
'북원 시대(1368년~1388년)' 이후의 몽골은 "타타르 시대(1388년~1635년)"로 접어들었다.1617 그러나 칭기즈 칸에서부터 시작된 '대몽골국'이라는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으며,18 원나라 시대의 한제 관직19도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나 지속적으로 유지되었고 다얀 칸의 시기에 가서야 변화가 일어난다. 대몽골 칸 정권의 정통성은 1635년 차하르부가 후금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본 문서에서의 '북원'은 일반적으로 1368년에서 1635년까지의 몽골사를 편의상 포괄하여 사용하고 있다.
而敵自脫古思帖木兒後, 部帥紛拏, 五傳至坤帖木兒, 咸被弑, 不復知帝號. 有鬼力赤 者篡立, 稱可汗, 去國號, 遂稱韃靼云.
"적(몽골)은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 토구스테무르 우스칼 칸) 이후부터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어지럽게 서로 싸워 오대(五代)가 전해져 곤첩목아(坤帖木兒, 군 테무르 토고간 칸)에 이르렀는데, 모두 피살되어 다시는 황제의 연호를 알지 못한다. (나중에) 귀력적(鬼力赤, 굴리치 울루그테무르 칸)이라는 자가 제위(帝位)를 찬탈(簒奪)하여 카안이라고 칭하고 국호(國號)를 버리고 마침내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칭했다고 한다.
— 「명사(明史)」 327권 열전 25제
역사
초원으로 물러나다
1368년 1월 23일, 명 태조(홍무제) 주원장은 황제의 자리에 올라 명나라를 건국하고 경쟁자들을 차례차례 물리쳐 남중국 일대를 통일하였으며, 장군 서달으로 하여금 북진하여 중원 지역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지정 28년 정월 4일 (1368년 1월 23일)에 이르면 명군은 이미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 이남까지 다다른 상태였다.2021 지정 28년 윤7월 27일 (1368년 9월 9일)에 원 혜종 토곤테무르는 진남왕 토곤의 넷째 아들인 회왕 테무르부카(帖木儿不花)를 임시 감국에 봉한 뒤 배경동(拜慶童)을 중서좌승상으로 삼아 두명에서 함께 항전하도록 명하고, 지정 28년 윤7월 28일 (1368년 9월 10일)에는 청녕전에서 삼궁후비(三宮後妃)·황태자(皇太子)·황태자비(皇太子妃)를 모두 모아 상도로의 퇴각을 제의하였다. 지추밀원사 흑시(黑厮), 내시 조백안 등은 대도에서의 결사항전을 간언했지만 혜종은 이를 듣지 않고 한밤중에 백여명과 함께 응창으로 피신하였다.2223 이후 지정 28년 8월 초이틀 (1368년 9월 14일)에 명군이 대도를 함락시킴에 따라 원나라는 완전히 몰락하였고, 본토인 몽골 초원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었다.
원 혜종이 대도에서 철수한 이후에도 몽골 정권은 계속 대원(大元)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당시 고려인들은 이를 두고 '북쪽으로 올라간 원나라'라는 뜻의 '북원(北元)'이라 불렀다.32425 이때 원나라는 영북, 요양, 감숙 이외에도 코케 테무르, 이사제, 장양필 등의 군벌들이 통치하는 행중서성의 서부 지역 (오늘날의 산서)을 간접지배했으며, 운남성의 서남부 지역에도 영향력을 다소 미치고 있었다. 또한 회회인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앙아시아 등지와도 경제적-정치적인 관계를 어느정도 유지하였다.26
중원을 완전히 잃어버리다
지정 28년 8월 4일 (1368년 9월 16일), 원 혜종은 상도에 도착하였다.27 그 무렵에 명군은 산서성과 대도 이북으로 진격 중이었다. 정28년 10월 3일 (1368년 11월 13일)까지 장군 빙승(冯勝)과 탕화(汤和)는 회경(怀慶)을 함락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택주(澤州) 및 노주(魯州)를 쳐 떨어뜨렸으며, 명장 서달은 코케 테무르를 물리쳐 태원을 점령하고 감숙 일대를 장악하였다. 지정 29년 정월 25일 (1369년 3월 3일)에는 대동이 함락되어 원나라는 마침내 중서성의 서부 지역을 상실하였다.
지정 29년 3월 6일 (1369년 4월 12일), 서달은 봉원(奉元)을 함락시키고 서안까지 나아갔으며, 원측의 장수인 장양필과 이사제를 잇달아 패퇴시켰다.2829 지정 29년 4월 1일 (1369년 5월 7일)에는 코케 테무르를 흔들고 속히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지정 29년 4월 11일 (1369년 5월 17일)에 명군은 공창(巩昌)을 함락시켰으며 원 장수 쿠투테무르(忽都帖木儿)는 이 시점에서 상도에 거하고 있었다. 지정 29년 4월 13일 (1639년 5월 19일), 이사제는 명나라에 항복했다.30
지정 29년 6월 12일 (1369 7월 15일), 명나라 측은 대흥(大興)을 함락시키고 중서우승상은 포로로 사로잡혔다. 이튿날 명군이 상도에 육박하자 원 혜종은 상도에서 퇴각하여 당일에 응창에 도착하였다. 이틀 뒤인 지정 29년 6월 15일 (1369년 7월 18일)에 콩코테무르(晃火帖木儿)가 이끄는 원군이 오던 도중에 신개령 전투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여 궤멸되었다. 지정29년 7월 19일 (1369년 8월 21일), 원나라가 원주(原州)와 경주(涇州)를 함락시켜 경양(慶陽)의 구원에 나섰으나 명나라 장수 빙종이(冯宗異)가 역마관(驛馬關)에서 명군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였다. 지정 29년 8월 21일 (1369년 9월 22일), 경양이 함락되었고 산서에서의 원나라 세력은 일제히 축출되었다.31
지정 30년 정월 초 3일 (1370년 1월 30일), 명 태조는 제1차 북벌을 일으켜 장수 서달, 이문충, 탕화에게 각각 병력을 주어, 세 갈래로 나누어 속히 진격하도록 하였다. 원 혜종은 이에 맞서 대신 삼보노(三宝奴)에게 조서를 내려 코케 테무르와 함께 이를 막도록 하였는데32 지정 30년 4월 7일 (1370년 5월 2일)에 원나라 군대는 서달이 이끄는 명군에게 대패하여 거의 궤멸되기에 이르렀다. 지정 30년 4월 28일 (1370년 5월 23일), 원 혜종이 응창에서 51세의 나이로 이질에 걸려 붕어하였으며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가 뒤를 이어 원 소종(元 昭宗)으로 즉위했다. 아유시리다라는 비록 패퇴하긴 했으나 군재가 뛰어나고 원 정권에 충성했던 코케 테무르를 국사에 중용하여 명군에 재차 저항하고자 하였다.33
선광 원년 2월 28일 (1371년 3월 15일), 원나라의 요양행성 평장 유익(劉益)은 항하표, 요동지도 및 소속 병마전량(兵馬钱量)의 액수를 모두 헌납하여 우승 동준(東遵), 첨원 양현(楊賢)을 명나라에 보내 항복하였고, 이로써 요동 남부가 명나라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 밖의 요동 지역은 원나라 장수 나하추(纳哈出)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곳에 20만 대군을 주둔시켜 대략 10년 동안 명군과 대치하면서 명나라의 회유를 거부하였다. 나하추는 지병(知兵)을 내어 명나라 군대를 여러차례 물리쳤으므로, 그의 치하에서 요동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하여 북원 정권의 중요한 기둥이 되었으며, 북원과 고려의 연대를 도와주기도 하였다.33
운남 곤명을 지키던 양왕(梁王) 정권은 원나라의 중국 통치가 끝나고 몽골인들이 북방 초원으로 퇴각한 이후에도 몽골에 충성을 다했다. 선광 원년 (1371년)에 명 태조는 탕화 등의 장군을 보내어 사천(四川)에 웅거한 명옥진(明玉珍)의 명하(明夏) 정권을 멸망시키고, 서남 지방은 운남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계속해서 저항하였으나 나중에 무력으로 합병되기에 이르렀다.
중흥지세
원나라의 명장 코케 테무르는 여전히 막북에 주둔하면서 명군을 견제하였다. 이에 명 태조는 여러 차례 서신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코케 테무르는 아랑곳하지 않아 명 태조로부터 "당세의 기이한 남자(當世奇男子)"라 불렸다.34 선광 2년 정월 26일 (1372년 3월 1일), 명 태조는 제2차 북벌을 일으켰다. 서달과 이문충(李文忠)은 각각 중로의 안문(雁門)과 동로의 거용관에서 출발하여 북진, 몽골 정권의 본거지인 카라코룸을 공격하기로 하였으며, 풍승은 란주(蘭州)에서 출발하여 감숙 지역을 완전히 정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3536 선광 2년 3월 20일 (1372년 4월 23일), 코케 테무르는 먼저 명나라의 선봉장 남옥(南玉)과 맞서 싸우는 척 하다가 후퇴하여 명군을 툴라 강변으로 깊숙하게 끌어들인 뒤에 적이 영북의 직전까지 다가오자 자신의 본대와 부장 하종철(賀宗哲)이 이끄는 대군을 일제히 일으켜 명나라 군대를 대파하였는데37 코케 테무르가 기세를 타고 명군을 닥치는대로 마구 살상하니 이 싸움에서 죽은 명군이 수만여 명에 달했다. 명나라는 풍승의 군대만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3836 선광 2년 6월 3일 (1372년 7월 3일), 원나라는 과주(瓜州)와 사주(沙州)를 풍승에게 빼앗겼고 이로 인하여 감숙 지방마저 완전히 명나라에게 넘어갔지만, 툴라 강에서의 패배로 명 태조는 10년 넘게 북벌을 다시 일으키지는 않았다. 한편 선광 8년 4월 13일 (1378년 5월 10일), 원 소종이 사망하자 그 동생인 천원제(天元帝) 토구스테무르가 즉위하였다.
원 황조 통치의 종말
천원 9년 (1387년), 이때 즈음에 코케 테무르는 이미 세상에 없었고 원나라 장수들도 대부분 명나라에게 투항하거나 사망한 상태였으며, 오직 나하추만이 여전히 20만 대군을 가지고 요양에 주둔하고 있었다.39 천원 9년 정월 2일 (1387년 1월 31일)에 풍승, 부우덕, 남옥 등의 명나라 장수들은 나하추의 근거지인 금산·농안·이통하 공략을 목표로 하여 다시 북벌을 감행하였다. 명나라의 갑작스러운 군사적 압박으로 인하여, 결국 나하추는 천원 9년 6월 29일 (1387년 7월 14일)에 명나라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북원 조정은 요양 지역을 상실하여40 군사적·경제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고려와의 연대도 이때에 이르러 끊어졌으며41 더욱이 동부의 우군이었던 나하추를 잃어 훌룬 부이르-크룰룬 강 일대를 정치적 중심지로 삼았던 북원은 명군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었다.
천원 10년 (1388년) 3월, 남옥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재차 북벌을 감행, 고비사막을 건너 몽골 초원 동쪽의 강주(慶洲)에 이르렀다.42 천원 10년 4월 12일 (1388년 5월 18일)에 남옥은 어로아해(捕魚兒海, 오늘날의 부이르 호) 부근에서 원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여러 황족들과 고위 관료들, 도솔 3천 명, 남녀 7만여 명, 가축 10만 마리를 사로잡은 뒤 귀환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천원제는 동부 지역의 상황을 반전시키려 출병하였으나 명군의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아 패주하였고, 이후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던 이수데르에게 시해당하였다. 중국사학계에서는 이수데르가 천원제의 인새를 빼앗고 원나라의 국호를 폐지한 점, 스스로를 '대원의 카안'이 아닌 '달단 (몽골)의 칸'이라고 자처하며 더 이상 제호와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이 때에 북원이 멸망했다고 본다.434445
오이라트의 흥기
홍무 21년 연간 (1388년)에 북원이 멸망한 이후 몽골은 몽골본부(蒙古本部), 즉 보르지긴 통치 하의 "동몽골(韃靼)"과 오이라트 연맹 통치 하의 "서몽골(瓦剌)"46, 그리고 명나라에게 복속하여 교역권을 얻은 "올량합 3위(兀良哈三衛)"로 나뉘어졌다. 동몽골은 오늘날의 오논 강, 크룰렌 강, 바이칼 호수 일대에 위치하였고 서몽골은 코브도 강, 이르티시 강, 그 남쪽의 준가르 분지에 위치하였으며, 올량합 3위는 명초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오늘날의 흥안령 동쪽, 해서(쑹화강) 서쪽, 북해의 남쪽, 황수(시라무렌 강)의 북쪽에 거주하였다.47 48 이들 3부 가운데 처음에는 동몽골이 중앙 초원지대를 차지하여 가장 강력했고 명나라와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였다. 그러나,「명사(明史)」에 따르면 "(동몽골은) 토구스테무르 이후부터 여러 부족장들이 서로 싸워 군 테무르에 이르렀는데, 그마저도 살해당하여 다시는 황제의 연호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때 보르지긴 가문의 힘은 크게 약화되었고, 명의 변경지대에 대한 위협도 줄어들었다.
북원이 붕괴하고 동몰골에서 보르지긴 가문이 몰락하는 동안 서몽골의 오이라트는 흥기의 기회를 잡았다. 명나라 영락제는 정난의 변 연간에 군사를 일으키면서 오이라트와 통하기도 했으며, 건문제를 몰아내고 즉위한 후에도 몽골 제부족들 가운데 오이라트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였다. 1408년, 영락제는 동몽골의 제23대 대칸이었던 울제이테무르 칸에게 조공을 요구했지만 몽골은 명의 사신이었던 급사중 곽기를 살해하는 것으로 이에 응답했다. 격노한 명락제는 몽골의 칸정을 멸하기 위하여 북벌을 일으켰는데, 그 무렵에 오이라트의 세 유력자인 마하무드, 타이핑, 바투 볼라드 등이 명나라에 와서 조공을 바쳤다. 영락제는 마하무드에게 순녕왕(順寧王)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등을, 타이핑에게는 현의왕(賢義王)을, 바투 볼라드에게는 안락왕(安樂王)의 왕작을 각각 하사하였다. 명나라로부터 직책을 받는다는 것은 황제에게 조공을 바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이는 곧 명나라와 직접 교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후의 오이라트는 명과의 교역을 통해 마련한 재력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49 이후 영락제의 몽골 친정(1409년~1424년)이 시작되자 동몽골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50 그 틈에 마흐무드는 몽골 서부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여, 몽골의 여러 제부족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오리라트는 서몽골의 단순한 일개 부족이 아니라 동몽골의 여러 유력 부족들이나 대칸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닌 거대 부족으로 성장하였다.
영락제는 오이라트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오이라트를 지원한 것은 어디까지나 몽골에 대하여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통해 양측의 세력을 모두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지, 이들을 몽골만큼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시키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마침 마하무드가 명나라에 의해 화령왕(和寧王)51으로 봉해진 아룩타이52를 수차례 공격하였다. 명나라는 오이라트가 아룩타이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역 중단 등의 압력을 가하였으나, 영락제의 의중을 파악한 마하무드는 오히려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알게 된 영락제는 1414년 오이라트 친정을 단행하여 마하무드를 대파하였다. 오이라트는 패배했고, 명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말을 바쳐 용서를 구하였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이를 금세 회복하였다. 1423년 마하무드의 아들인 토곤은 크룰렌 강 일대의 동몽골인들을 공격, 수많은 포로들과 가축을 사로잡아 끌고 갔고 나머지 두 수령들(타이핑, 바투 볼라드)를 복속시켜 서몽골 각부를 모조리 장악하였으며, 1434년에 재차 동몽골에 침입한 뒤 아룩타이와 그가 옹립한 아다이 칸을 살해하며 동서몽골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이후에 토곤은 스스로 대칸을 칭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그가 황금씨족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면서 강하게 반발하자 포기하였다. 그 대신 타이순 칸을 옹립하여 후룬베이얼의 초원 지대에 거하도록 하고,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대칸 다음가는 직책인 타이시(太師)를 자처하여 장성 이북 초원 지대의 정치적-경제적 실권을 모두 손에 넣었다. 1439년에 토곤이 죽자 그 아들인 에센이 타이시에 올랐는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이라트의 세력은 최성기에 이르러, 동몽골의 각부를 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 압력, 봉관설치, 혼인 동맹 등의 수단을 이용하여 키르기스, 하미53, 사주(沙州), 한동(罕东), 치근(赤斤), 올량합 등을 모두 복속시킴으로써 장성 이북을 장악하였고 동쪽으로는 만주의 여진과 조선에서부터 서쪽으로는 탈라스와 발하슈 호 일대의 금장 칸국과 국경을 접하였다.
토목의 변
脫懽死, 子也先嗣, 益桀驁自雄, 諸部皆下之, 脫脫不花具可汗名而已. 脫脫不花歲來朝貢, 天子皆厚報之, 比諸蕃有加, 書稱之曰達達可汗, 賜賚幷及其妃. 十四年秋, 也先謀大擧入寇, 脫脫不花止之曰: 「吾儕服食, 多資大明, 何忍爲此?」 也先不聽, 曰: 「可汗不爲, 吾當自爲.」 遂分道, 俾脫脫不花侵遼東, 而自擁衆從大同入. 帝親征之, 駕於土木陷焉. 景皇帝自監國卽位, 尊帝爲太上皇帝. 明年秋, 上皇歸自也先.
태환(脫懽, 토곤)이 죽자 아들 야선(也先, 에센)이 뒤를 이었는데, 더욱 성질이 사납고 교만했으며 스스로 웅걸(雄傑)을 칭하였고, 여러 부락이 모두 그의 손아래 들어와 태태불화(脫脫不花, 톡토아부카 타이순 칸)는 가한(可汗)이라는 칭호만 갖추고 있을 뿐이었다. 태태불화가 매년 내조하여 진공하자 천자는 모두 그에게 후하게 보답하였는데, 여러 번(蕃)에 비해 더 많이 주었고 문서에 그를 칭하여 달달가한(達達可汗, 몽골의 카안)이라고 하였으며, 그의 비에게도 아울러 상을 하사했다. 정통 14년(1449) 가을에 야선이 대거 들어와 노략질하려고 하였는데, 태태불화가 그를 제지하며 이르기를, “우리들 의복과 식량(服食)은 대부분 대명(大明)의 도움을 받았는데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려는가?”라고 하였다. 야선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가한이 하지 않아도 내가 마땅히 스스로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길을 나누어 태태불화에게 요동을 침입하게 하고, 자신은 무리를 이끌고 대동(大同)에서 침입하였다. [이에] 황제가 친정(親征)하였으나, 어가(御駕)가 토목(土木)에서 함락되었다. 경황제(景皇帝)가 감국(監國)하다가 [황제에] 즉위(卽位)하여, 황제(영종)를 높여 태상황제(太上皇帝)라 하였다. 이듬해(1450) 가을에, 상황(上皇, 영종)이 야선이 있는 곳에서 돌아왔다.
— 「명사(明史)」 325권 열전 215제 외국 8
에센의 통치 하에서 오이라트는 세력이 매우 늘어 항상 중원 지역을 노렸지만, 이를 표면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 양을 점차 늘려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세력을 계속 확장하여 명나라의 북방 국경을 지속적으로 위협하였다.54
정통 9년 (1444년)부터 오이라트는 대대적인 명나라 침공을 준비하면서 장성 이북의 부족들을 상대로 일련의 군사행동을 벌였다.55 정통 10년 (1445년)에는 하미국(哈密國, 카라델)로 쳐들어가 복속시키고, 이듬해에는 올량합 3위(兀良哈三卫)를 정복하고 사주위(沙州卫), 적근몽고위(赤斤蒙古卫), 한동위(罕东卫) 등 가욕관 서부의 삼위를 점령하여 몽골의 막남, 막서, 막북을 철저히 장악함으로써 온 사방에 세력을 떨쳤다. 명나라 조정의 많은 관료들은 오이라트의 강성함에 경각심을 갖고 경계하였으나 당시 환관 왕진(王振)이 전횡을 일삼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조치도 할 수가 없었다.
한편 영락제의 치세에서부터 시작된 몽골의 조공 무역은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관례화되어 정통제 대에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명 조정은 국경에 호시(互市)를 두어 유목민들의 준마 및 호피과 중국의 물자를 서로 교환하는 것을 전제하여 무역을 실시하였는데, 에센은 여기에 주목하여 정통 13년 (1448년) 12월의 기록에 따르면 "인원이나 말 등을 허위로 보고하는 등의 행동5657"을 일삼아 이득을 보았다. 이에 명나라는 조공과 호시에 세밀한 규정을 두어 사신의 수와 시기 및 경로를 지정하여 엄격히 통제하도록 하였으며, 에센의 이러한 행위에 재재를 가하였다. 왕진은 사절의 수를 보고받은 후에, 예부에 명하여 물품을 실제 인원수에 따라 주도록 하고 공마를 기존 가격의 4/5로 낮춤으로써 오이라트가 당초에 요구했던 총량의 1/5만 지급하였다. 이에 격노한 에센은 "명나라가 먼저 공사를 괴롭히고 혼약을 파기하며58 공물을 마음대로 삭감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대대적으로 명나라를 침공하였다.5960
정통 14년 (1449년) 가을에 에센은 타이순 칸과 휘하 장수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대동, 적성, 요동, 감숙 등지를 일제히 침공하였다. 명군은 이에 맞서 분전했으나 잇달아 패전하여 교외의 성곽이 함락되었고, 전선은 계속해서 밀려났다. 왕진은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정통제가 친히 출정하도록 유혹하였다. 이부상서 왕직(王直) 등은 "변경에서의 패배는 자고로 있는 일(边鄙之事,自古有之)"이라며 간언하였으나, 정통제는 이를 듣지 않고 오이라트의 주력 군대가 어디에서 오는지도 모른 채로 급히 군대를 집결시켜 출병하였다.
정통 14년 7월 17일, 정통제는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진을 대동하여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시작했다. 친정의 조서가 내려진 뒤에 정통제는 문무대신의 모든 간언을 묵살하고 오직 왕진의 말만을 따랐다. 명목상으로는 친정이었지만, 군무의 대사는 모두 왕진이 결정하였고, 장수들은 왕진과 환관들의 지휘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여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으므로 명군은 연전연패하였다. 오이라트 군대는 후퇴하는 척 하며 명나라 군대를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였다.61 얼마 안있어 명군은 오이라트에게 포위당하여 토목보(土木堡)에 고립되었다. 토목보에는 마땅한 수원지가 없었고, 인근의 개천도 모두 오이라트가 점령했으므로6263 장병들과 군마들은 갈증에 시달렸다. 8월 15일에 오이라트가 철수하는 낌새가 보이자 정통제는 급하게 탈출하려 시도했으나, 갑작스럽게 오이라트 군대가 되돌아와 사방으로 포위하여 공격하자 명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이 전투에서 수십만 명이 사망했고 남은 병졸들은 10만 명도 되지 못했으며, 고위 관료 50여 명이 전사하고 노새, 군마 20여만 마리와 갑옷 수십만 필이 모두 오이라트에게 약탈당했을 뿐만 아니라64656667 정통제는 아예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에센은 의외의 결과에 놀랐지만 정통제를 돌려주는 대가로 교역상의 요구를 관철시키는 데에 만족하기로 하여 당초의 약속을 이행하라고 명 조정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명 조정이 정통제의 동생 주기옥(朱祁鈺)을 경태제로 추대하고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자 수도 북경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병부상서 우겸을 위시한 명군과 시민들의 맹전으로 사상자가 막심한 채 패퇴하였고, 부하들이 더이상의 전투는 반대하여 오이라트 내에서의 내부 갈등이 심화되자, 에센은 할 수 없이 1450년에 아무런 보상 없이 정통제를 돌려주고 이전의 통공호시(通公護市)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만족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처리는 오이라트인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으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가 스스로 '대칸'을 칭했다는 데 있었다. 1453년에 에센은 타이순 칸을 살해하고 동몽골의 보르지긴 씨족들을 대거 학살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대원전성대가한(大元田盛大可汗)'을 자처하며 대칸에 즉위하였다.68 이는 보르지긴 혈통을 중시했던 몽골인들의 관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결국 1455년에 에센은 불만을 품은 부하에게 살해당하였고, 이로써 마흐무드 이래로 이어져온 오이라트 패권은 무너져 내렸다.
동몽골의 재흥
에센 사후(1455년)에 동서몽골은 곧 다시 분열되었으며, 특히 동몽골은 몽골 귀족들과 보르지긴 황족들이 난립하여 초원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세력있는 유목 수령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정권이 바뀔때마다 칸을 갈아치우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명목상의 대칸으로 오헤크트 칸, 멀런 칸 등이 즉위하기도 했었으나 정쟁으로 말미암아 모두 1년만에 시해 당하여 내부 분열이 더욱 격렬해졌다. 때문에 성화 11년 (1475년)에 만돌 칸이 대부분의 몽골 제후들을 제압하고 즉위하기 전까지, 몇십년 가까이 몽골의 대칸 자리는 공허하였다.
1479년에 만돌 칸도 시해당하고 오이라트 수령 이스마일에 의해 새로운 칸이 옹립되었는데, 그는 바로 다얀 칸의 아버지 바얀 뭉케였다. 1487년 바얀 뭉케가 피살되자 어린 그의 아들 바투 뭉케가 스스로를 '다얀 칸'이라 자처하였다. 그는 몽골의 수계혼 풍습에 따라 조부 만돌 칸의 부인이었던 만두카이 카툰과 혼인하였다.69 다얀 칸은 즉위 직후에 곧바로 오이라트에 여러 차례 친정하여 동몽골에 대한 오이라트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였고, 그뒤에는 몽골의 제부족들을 차례차례 무력이나 외교 등으로 복속시켜 15세기 말엽에 이르러선 오이라트를 제외한 몽골을 완전히 통일하는 데에 성공했다.
다얀 칸의 치세 중반까지는 그가 몽골의 통일전쟁에 주력했기 때문에 대체로 명나라의 변경은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495년부터 다얀 칸이 중국 북변에 대대적인 약탈 원정을 벌이며 군사적 압력을 가하자 양측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홍치 14년 (1501년)에 명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변방의 몽골 부락들을 토벌한 뒤에는 더욱 그랬다. 이에 다얀 칸은 오르도스부와 연합하여 영하 방면을 공략하고, 1500년~1507년 사이에 명나라 서북변에 대한 전면적인 약탈전을 전개하였다. 정덕 12년 (1517년) 10월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대동을 침공하여 양허, 응주 등을 무자비하게 약탈한 뒤 돌아가기도 할 정도였다. 다얀 칸은 1543년70에 사망하기 전까지 매년 명나라를 공격하였다.7172 그의 치세에 몽골은 북쪽의 시베리아 툰드라와 바이칼호에서부터 고비 사막을 넘어 남쪽으로 황하 가장자리까지, 더 나아가서는 오르도스까지 뻗어 있었고 동쪽으로는 만주의 삼림지대에서 알타이 산맥을 지나 중앙아시아의 초원까지 이르렀다.73
몽골 초원을 통일한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온 몽골인들을 모두 6만호 (투멘)으로 재편하여, 좌익에 차하르-우량카이(올량합)-할하의 3만호를, 우익에 투메드-오르도스-융셰부(윙시에부)의 3만호를 각각 배치했다. 그는 이 6만호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유목생활을 하는 지역적 범위를 정하고, 각 만호를 지배하는 칸에는 자신의 아들과 친족들을 임명하여 세습하도록 하였다. 또한 자신은 차하르부의 수령이자 좌우익 6만호를 모두 통치하는 '대칸'으로서의 지위를 명시하였고, 자신의 셋째 아들 바르스 볼라드는 투메드부의 술령이자 우익 3만호의 지배자인 지농으로 임명하여 칸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6만호 체제는 이후 몽골 유목민의 정치적 구성의 골간이 되었다.74
황혼기
다얀 칸 사후의 몽골은 뒤이은 대칸들의 통치 하에서 다시금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처음에는 다얀 칸의 3남이자 지농이었던 바르스 볼르드가 대칸으로 즉위하였으나, 내전을 우려하여 곧 정통 후계자였던 보디(보디 알락 칸, 다얀 칸의 장남의 아들)에게 양위하였다. 이때는 다얀 칸이 사망한지 채 반세기도 채 지나지 않았었지만 대칸의 권위는 벌써부터 위태해지기 시작했다.
1520년에 우량카이 투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보디 알락 칸은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쉽사리 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사촌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 그가 우량카이 반란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하자, 이후의 몽골의 제부들은 각자 분열되어 약화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대칸의 권력은 좌익 3투멘에만 국한되게 되었다. 이제 대칸의 이름은 명목상인 것이 되었으며, 우익 3투멘은 사실상 지농과 여러 몽골 제후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547년에 즉위한 보디 알락 칸의 장남 다라이손 구덴 칸 시기에는 대칸의 권력 쇠퇴이 더욱 두드러진다. 특히 그의 치세에 대칸을 제치고 새롭게 떠오른 인물로는 바르스 볼르드 지농의 차남이자 투메드부의 칸이었던 알탄 칸이 있었다.75 알탄 칸은 공공연히 대칸의 힘에 저항하고 대들었다. 1547년 알탄 칸이 명나라와 연합하여 그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자, 다라이손 구덴 칸은 내몽골에서 요하 상류로 이동하였고 그에게 '게게엔 칸(格堅汗)'이라는 직책을 내려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대칸의 권위는 완전히 쇠락하여 이 즈음이 되면 사실상 차하르부에만 권력이 미치게 되었고, 게다가 알탄 칸에게 '칸'의 직위를 부여한 일로 인하여 각지의 보르지긴 부족장과 유력 제후들이 자기 영지에서 칸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를 이은 투멘 자삭투 칸은 투메드의 알탄 칸 및 할하의 아바타이 칸, 오르도스의 호톡타이 세첸 콩타이지와 협력하여 분열되었던 몽골 초원을 일시적으로 통일하였다. 그는 우량카이와 다우르족, 에벤키족을 정복하고 동쪽의 여진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옛 몽골 문자로 작성된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대칸의 권위를 조금이나마 높이려 시도하기도 했다.76 한편 몽골 초원에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창궐하고, 중국에서 들여오는 물자가 부족해지자 몽골인들은 다시금 중국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명나라는 1571년에 우익 3투멘과 무역을 시작하였다.7778
불교로의 개종
몽골 제국과 원나라 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널리 번성했었으나 그 이후에는 침체기에 접어들어 북원에 이르러선 기존의 텡그리 신앙이나 샤머니즘이 퍼져있었다. 그렇지만 16세기 들어 알탄 칸이 청해(코코노르)를 정복하고, 몽골의 영역이 직접적으로 티베트와 맞닿게 되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알탄 칸은 자신의 권위 강화를 위하여 1576년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대표 소남 갸초를 초청하여, 청해의 차브치얄이라는 장소에서 회동하는 등 티베트 불교와의 접촉 빈도를 점차 늘려갔다. 이에 소남 갸초도 알탄 칸을 원세조 쿠빌라이의 전생으로 인정하고, 알탄 칸으로부터 제3대 달라이 라마로 임명되어 권위를 세웠다.79 이후 티베트 불교는 동서를 막론하고 오이라트인과 몽골인들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특히 할하부의 수령 아바타이 사인 칸은 달라이 라마와 회견하고 티베트 불교의 전파에 적극 노력하는 한편으로, 1586년에는 고도 카라코룸의 폐허 위에 몽골 최대의 사원인 에르데니 조오 사원을 세웠다. 1587년 사망한 달라이 랄마의 뒤를 이은 후계자가 할하부 왕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티베트-몽골 간의 정치종교적 유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1639년, 할하 좌익 투시에트부의 수장 곰보도르지 칸의 차남이었던 자나바자르가 몽골 불교 교단의 수장 격인 젭춘담바 후툭투로 추대되자 티베트 불교의 몽골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초대 젭춘담바 후툭투로서 자나바자르는 다양한 저술 등을 남기면서 몽골 문화에 큰 족적을 남겼다. 1640년 에 동서 몽골의 수령들이 모여 제정한 《몽골-오이라트 법전》에서는 왕공 가문마다 한 명씩을 라마승으로 귀의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티베트 불교는 이후로도 몽골 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19세기에 이르면 몽골은 사실상 종교 민족이 되었다. 당시 몽골 남성의 30%가 승려였고, 1889년 울란바토르의 인구 20,000명 가운데 14,000명이 승려였다 기록되었다.
쇠퇴와 멸망
링단 칸(1588년~1634년)은 동몽골 최후의 위대한 칸으로써, 분열되어 있던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려 시도한 마지막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즉위할 당시 대칸의 권력은 차하르부에만 미쳤고, 할하부와 오이라트인들은 더 이상 대칸에게 복종하지 않던 상태였다. 이에 링단은 차하르부의 차간 바이싱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불교 수도원 설립, 티베트 문학 번역, 대중국 무역 촉진 등의 정책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반항적이던 투메드부와 하르친부를 정벌하고 대칸이 직접 임명한 관리를 파견하여 각 제부들을 원할히 통제하려 시도했다.
한편 1616년이 되자 여진족은 누르하치의 영도 하에서 동아시아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몽골족과 많은 유사성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들은 유목민이 아니라 반농반목 생활체제를 가진 부락민이었다. 누르하치는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우선 몽골부터 굴복시키기로 결정한다. 이미 1593년 해서여진 4부(예허, 하다, 올라, 호이파)가 카라친 및 내할하 5부와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다가, 오히려 대패하여 그에게 복속한 일이 있었다. 1603년, 할하 몽골인들은 누르하치에게 "수러 쿤둘런 한(만주어: ᡴᡠᠨᡩᡠᠯᡝᠨ ᡥᠠᠨ, Kündelen Qa'an)"이라는 존호를 바쳤고 1616년에 이르러 그가 여진족을 통일하자 "수러 겅기연 한(만주어: ᠰᡠᡵᡝ ᡤᡝᠩᡤᡳᠶᡝᠨ ᡥᠠᠨ, Genggiyen Han)"을 칭하기에 이른다.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함으로써 링단은 그와 직접적으로 영역을 맞닿게 되었고, 커져만 가는 그의 위세에 점차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1618년에 링단 칸은 명나라로부터 화폐 보조를 받는 대가로 여진족의 공격으로부터 명나라 북부 국경을 방어하기로 약속,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와 그 뒤를 이은 홍타이지의 맹공, 그리고 여진족과 동맹을 맺은 몽골 제부들의 공격에 링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부족들이 릭단 카안을 버리고 여진족에게로 투항하였다.80 또한 링단 칸의 중앙집권화 시도에 반발한 모든 부락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우익 3투멘과 남 할하는 동맹을 맺고 차하르부를 공격했다. 링단은 이들을 격파했으나, 피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서천하여 재기를 노리기로 하였다.
1627년, 링단은 투메드부를 복속시키고 오르도스 지역을 장악하여, 강력한 통합 정책과 대명경제의 확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고 게다가 명나라의 변경 약탈도 내부 통합체제가 공고하지 않은 상태에선 쉽사리 성공을 거두기 힘들었다. 후금(여진)과 몽골의 연맹이 동부 지역을 위협하고 있었던 점도 링단 칸의 상황을 불안정하게 했다.81 1627년에 남부 몽골의 왕공들은 후금의 도움을 받아 링단 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링단은 이들을 자오헨 전투에서 패배시켰지만, 후금군이 대규모로 진군하자 이를 피하여 급히 피신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오르도스부와 투메드부마저 후금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1632년부터 1634년까지, 내몽골 영토의 대부분은 후금과 그에 투항한 몽골 연합군에 의해 모조리 점령되었다. 링단 칸은 오르도스로 후퇴했다가 그 다음에는 청해(코코노르) 방면으로 이동했지만 티베트로 가던 중에 1634년 8월 7일 지금의 감숙 지방에서에서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망했다.82 그의 아들이었던 에제이는 후금의 후신국인 청나라에게 항복하였고,83 이듬해(1635년 2월)에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숭덕제)에게 몽골 제국의 인장을 바쳤다. 이로써 칭기즈 칸이 세운 대몽골국은 430년 만에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8485
동몽골에 잔존해 있던 외할하 4부(코토코이드칸부, 자사그투칸부, 투시예트칸부, 세첸칸부)는 청나라의 통치에 반대하면서 독립과 종주권을 유지하려 애썼고 1640년에는 오이라트 제부와 타르바하타이에서 회맹하여 《할하-오이라트 법전》을 제정하는 등 계속해서 대항했지만, 청나라의 압력이 점진적으로 심화되어가던 와중에 서쪽에서 새롭게 떠오른 준가르의 갈단이 침입해오자 결국에는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몽골은 외몽골(할하)과 내몽골(차하르)로 각각 나뉘어져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된다.868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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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