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멸망
660년 나당연합군이 수륙 양면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를 무너뜨리고 사비성을 함락했으며, 웅진성으로 피했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가 멸망한 사건이다.
시작~종료 660년 7월 9일 ~ 660년 8월 29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목차
상세 타임라인
개요
660년(의자왕 20, 태종무열왕 7) 당의 소정방이 이끈 13만 군과 신라의 5만 군이 백제를 협공하였다.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 5천을 격파했고, 당군은 금강 하구 기벌포에 상륙해 백제군을 물리쳤다. 두 군대는 사비성을 포위했고,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했다가 음력 7월 18일 항복했다. 이로써 678년 동안 이어졌다고 전하는 백제는 멸망했다.
날짜 표기: 이 문서의 날짜와 타임라인은 위키백과 「백제의 멸망」이 제시한 음력·양력 대응(음력 5월 26일=양력 7월 9일, 6월 18일=7월 30일, 6월 21일=8월 2일, 7월 10일=8월 21일)을 기준으로 양력으로 적었다. 같은 달 안의 날짜는 이 대응에서 날수를 더해 환산했다. 본문에는 『삼국사기』의 음력 날짜를 함께 적는다.
배경
- 백제의 공세와 고립: 의자왕은 즉위 직후 신라를 강하게 몰아붙여 642년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고, 655년에는 고구려·말갈과 함께 신라 북쪽 33성을 쳤다. 651년 당이 신라와 화해하라고 경고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 나당동맹: 648년 나당동맹 이후 신라는 친당 정책을 강화했고, 당은 고구려를 직접 치는 대신 먼저 백제를 무너뜨려 고구려의 남쪽에 제2전선을 만들고자 했다. 659년 당은 일본 사신을 억류하는 등 이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 백제 내부의 동요: 655년 무렵부터 왕비(군대부인)를 비롯한 왕족이 정치 전면에 나섰다. 656년 좌평 성충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하며 육로는 탄현(침현), 수로는 기벌포를 막으라고 간했으나 옥에 갇혀 죽었다. 이를 두고 지배층의 분열을 멸망의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전개
출병
660년 3월 당 고종은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수륙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고, 신라 왕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호응하게 했다. 당군은 산둥반도 동쪽 끝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넜다. 신라에서는 음력 5월 26일(양력 7월 9일) 태종무열왕이 김유신·진주·천존 등과 함께 왕경을 떠나, 6월 18일(7월 30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이르렀다.
덕물도 회합
6월 21일(8월 2일) 태자 법민이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지금의 인천 옹진군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곳을 덕적면 소야도로 본다. 두 사람은 7월 10일(8월 21일) 백제 도성 남쪽에서 만나 함께 사비성을 치기로 약속했다. 무열왕은 금돌성(지금의 상주 백화산 일대)에 머물렀고, 김유신은 정예 5만을 이끌고 남하했다.
백제 조정의 혼란
급보를 받은 의자왕이 신하들에게 대책을 묻자 의견이 갈렸다. 좌평 의직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이 지쳤을 때 먼저 치자고 했고, 달솔 상영은 당군은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막아 지치게 하고 먼저 신라군을 꺾자고 했다. 귀양 가 있던 좌평 흥수는 "백강과 탄현은 나라의 요충이라 한 사람이 창 하나로 막아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한다"며 두 곳을 지키자고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흥수가 원한을 품고 있다며, 당군이 백강에 들어와 배를 나란히 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좁은 길에서 말을 나란히 할 수 없게 한 뒤 치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 사이에 당군과 신라군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
황산벌과 기벌포(7월 9일, 양력 8월 20일)
의자왕은 달솔 계백에게 결사대 5천을 주어 황산벌로 보냈다. 계백은 세 곳에 진영을 세우고 신라군과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반굴과 관창의 희생으로 사기가 오른 신라군의 총공격에 무너지고 전사했다(황산벌 전투). 같은 날 소정방과 김인문의 당군은 기벌포에 이르러 맞서는 백제군을 크게 깨뜨렸다. 중국 측 기록은 당군이 강 어귀의 진흙 펄에 버들자리를 깔고 상륙했으며, 맞서던 백제군 수천 명이 죽었다고 적는다.
기일을 둘러싼 갈등
황산벌에서 시간을 지체한 신라군은 약속 날짜보다 늦게 당군 진영에 이르렀다. 소정방이 기일을 어겼다며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하자, 김유신은 "대장군이 황산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기일을 어긴 것만으로 죄를 삼으려 한다면, 반드시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치겠다"고 맞섰다. 소정방의 부장이 말려 김문영은 풀려났다.
사비성 포위와 함락
7월 12일(8월 23일) 나당연합군은 사비 도성을 포위하고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갔다. 의자왕은 13일(8월 24일) 밤 태자 효와 함께 측근을 데리고 북쪽의 웅진성(지금의 공주 공산성)으로 피했다. 사비성에 남은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성을 지켰으나, 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가 멋대로 왕이 되었으니 당군이 물러가더라도 우리가 온전하겠는가"라며 측근과 함께 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갔고, 백성들이 많이 뒤따랐다. 당군이 성 위에 깃발을 세우자 태는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신라본기는 이때 왕자 융과 대좌평 사택천복 등이 나와 항복했다고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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