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동맹
648년(진덕여왕 2) 신라의 김춘추가 당에 들어가 태종과 맺은 군사 동맹으로,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시작 648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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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나당동맹은 648년 신라의 이찬 김춘추가 아들 문왕과 함께 당에 들어가 당 태종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받으면서 성립한 신라와 당의 군사 동맹이다. 이 동맹에 따라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후 처리를 둘러싼 갈등은 670년 나당 전쟁으로 이어졌다.
배경
642년 신라는 백제에게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 40여 성을 잃고,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당항성마저 위협받았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를 청하러 갔으나 연개소문 정권이 죽령 이북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거절했고, 왜와의 교섭도 성과가 없었다. 643년 신라는 당에 구원을 청했고, 당 태종은 여왕이 다스리기 때문에 이웃 나라가 업신여긴다며 당 왕족을 보내 신라 왕으로 삼겠다는 등의 방책을 내놓아 신라 조정을 흔들었다. 647년 상대등 비담이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춘추·김유신 세력이 이를 진압하고 진덕여왕을 세우면서 실권을 잡았다.
한편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안시성에서 실패한 뒤, 당은 고구려를 정면으로 공략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경과
648년 김춘추는 아들 문왕(文王)과 함께 당에 갔다. 당 태종은 그를 후하게 맞았고, 김춘추는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해 허락받았다. 이어 김춘추는 백제가 해마다 신라를 침략하여 수십 성을 빼앗고 조공 길을 막고 있다며 군사를 청했고, 태종은 출병을 허락했다. 김춘추는 신라의 관복을 당의 제도에 따르겠다고 청했으며, 귀국할 때 문왕을 당에 남겨 숙위하게 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고구려 순라병을 만났는데, 수행원 온군해가 김춘추의 옷과 관을 쓰고 대신 죽어 김춘추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동맹의 내용
동맹 당시의 약정문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671년 문무왕이 당 장수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답설인귀서」)에 따르면, 태종은 김춘추에게 "내가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략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니,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차지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과
- 신라의 친당 정책: 649년 중국식 의관을 채택했고, 650년부터는 신라 고유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 영휘(永徽)를 썼다. 진덕여왕은 650년 당 고종의 덕을 기리는 「태평송」을 비단에 수놓아 보냈다. 651년 정월 하례 제도를 실시하고 품주를 집사부로 개편하는 등 당 제도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했다.
- 연합 작전: 649년 태종이 죽은 뒤 일시 주춤했으나, 654년 김춘추가 즉위(태종무열왕)한 뒤 655년 고구려·백제·말갈이 신라 북쪽 33성을 빼앗자 신라가 다시 구원을 청했고, 660년 소정방의 13만 군이 백제를 쳤다.
- 갈등의 씨앗: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어 직접 지배하려 했고,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삼았다. 신라는 이를 약속 위반으로 보아 670년 나당 전쟁을 일으켰다.
영향과 의의
나당동맹은 고립 위기에 처한 신라가 외교로 활로를 연 사건으로, 신라가 삼국 통일의 주체가 되는 출발점이었다. 동시에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판과, 결과적으로 고구려의 옛 땅 대부분을 잃는 통일이 되었다는 한계도 함께 지적된다.
이설·논쟁
영토 분할 약속은 신라 측 문서인 「답설인귀서」에만 보이며, 당 측 기록에는 없다. 신라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강조한 내용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 r110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