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전쟁
백제·고구려 멸망 뒤 한반도 지배를 노린 당에 맞서 신라가 670년부터 676년까지 벌인 전쟁으로, 675년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의 승리로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다.
시작~종료 670년 3월 ~ 676년 11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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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나당 전쟁(羅唐戰爭)은 신라와 당이 670년(문무왕 10)부터 676년(문무왕 16)까지 7년 동안 벌인 전쟁이다. 670년 3월 신라의 오골성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672년 8월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크게 졌지만, 675년 9월 매소성 전투가 분수령이 되어 전세가 신라로 기울었다.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를 끝으로 전쟁이 마무리되었다. 이 문서의 날짜는 음력이다.
원인
- 영토 문제: 648년 나당동맹 때 당 태종은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신라는 주장했다. 그러나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두었고,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신라까지 당의 기미 지배 아래 두려 했다. 665년에는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문무왕과 취리산에서 회맹하게 했다.
- 군령권 침해: 백제·고구려 원정 과정에서 당군이 신라군을 지휘하며 신라의 군령권을 침해했고, 신라 왕과 군부의 반발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 전투 뒤 소정방이 신라 독군을 베려 했던 일도 그 예이다.
- 전략 요충의 확보: 평양을 견제하고 한강 하류를 지키는 데 필요한 비열홀(지금의 안변)을 두고도 갈등이 있었다. 비열홀은 고구려 멸망 이전부터 신라가 장악했으나 당은 이를 안동도호부에 넣으려 했다.
전쟁 준비(669)
신라는 고구려 멸망 직후인 669년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했다. 외교 사절을 통해 당을 속이고 정보를 모았으며, 대사면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무기의 성능을 높이고 목장을 다시 나누어 기병을 강화했다. 불교계 인사를 등용하고 심리전도 활용했다.
전개
1단계: 신라의 선제공격(670~671)
- 670년 3월 오골성 공격: 사찬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가 각각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지금의 랴오닝성 봉황산성 일대)을 쳤다. 4월 당군이 계속 몰려오자 백성(白城)으로 물러났다. 정병 1만이 동원되어 말갈·당군과 접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나당 충돌의 시작으로 본다.
- 고구려 부흥 지원: 670년 8월 신라는 한성에서 일어난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고구려 부흥 운동).
- 웅진도독부 공격: 670년 7월부터 671년 7월까지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전면 공격해 백제 옛 땅의 80여 성을 빼앗았다. 671년 6월 석성 전투에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러 온 당군을 물리쳤고, 7월 사비 일대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도독을 두었다. 같은 달 문무왕은 당의 설인귀가 보낸 항의 서신에 긴 답서(「답설인귀서」)를 보내 신라의 입장을 밝혔다.
2단계: 당의 반격과 신라의 수세(671~674)
670년 4월에 편성된 고간의 동주도행군과 이근행의 연산도행군은 671년 7월 안시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누르고 평양으로 남하했다. 672년부터 황해도에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672년 8월 석문(지금의 황해도 서흥) 전투에서 신라는 장군 7명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했다. 신라는 당에 사죄 사신을 보내는 한편 전국적으로 성을 쌓으며 공세에서 방어로 전략을 바꾸었다. 673년 무렵 신라의 방어선은 대동강 선에서 임진강 선까지 밀려 내려왔다. 그러나 신라 수군의 활동과 신라군의 결전 회피로 당군의 보급 문제가 점점 커졌다.
674년 정월 당은 문무왕의 관작을 깎고 당에 있던 그의 아우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았으며,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했다.
3단계: 매소성 전역(675)
675년 2월 유인궤는 칠중성(지금의 파주 적성) 전투에서 이기고 당으로 돌아갔고, 이근행이 병력을 보충받아 한반도 경략을 맡았다. 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관작을 되찾는 등 외교로 시간을 벌었다. 9월 설인귀의 수군이 서해의 천성(지금의 파주 탄현면 오두산성 일대)을 공격했으나 신라 장군 문훈 등에게 패했다. 이어 9월 29일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이근행의 군대를 물리치고 전마 3만 380필과 그만큼의 병장기를 얻었다. 매소성 전투를 전후해 천성·아달성·칠중성·적목성·석현성 등에서 싸움이 잇따랐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를 하나의 '매소성 전역(戰役)'으로 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당군은 끝내 임진강 선을 뚫지 못했다.
4단계: 당의 철수와 기벌포 전투(676)
676년 2월 당은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웅진도독부를 건안고성으로 옮겼다. 676년 윤3월 토번이 당의 내지를 침입하자 당은 신라 전선을 포기하고 토번 전선에 힘을 쏟았다. 676년 11월 설인귀의 수군이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 나타났고, 신라 사찬 시득(施得)은 첫 싸움에서 졌으나 크고 작은 22번의 전투 끝에 4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 싸움은 당군의 철수 작전과 관련된 전투였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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