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영변에서 일으킨 반란. 반란군은 관군을 잇달아 깨뜨리고 한양을 점령해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으나, 안현(길마재) 전투에서 패한 뒤 이천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시작~종료 1624년 3월 11일 ~ 1624년 4월 2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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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이괄의 난은 1624년(인조 2) 음력 1월 인조반정의 공신이자 평안병사 겸 부원수였던 이괄(李适)이 평안도 영변에서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군은 도원수 장만이 지키던 평양을 비켜 샛길로 빠르게 남하하며 황주 신교, 마탄, 임진에서 관군을 잇달아 깨뜨렸고, 음력 2월 11일 한양을 점령했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도성을 차지하고 새 왕을 세운 것은 조선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진 안현(길마재) 전투에서 패하고, 달아나던 이괄은 이천에서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배경
통설과 재해석
이괄은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에 그쳤고,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나가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치밀하게 반란을 준비했다는 것이 오랜 통설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통설에 의문을 제기한다. 당시는 후금이 강성해 북방 방어가 국가의 최대 과제였고, 최전방 군대를 직접 지휘하는 부원수는 중책이었다. 이괄 역시 영변에 부임한 뒤 군사 조련, 성책 보수, 진의 경비 강화에 힘을 쏟았다. 따라서 인사에 대한 불만만으로 반란을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고변과 압송 시도
반정 뒤 공신들은 반대 세력을 몹시 경계했고, 역모 혐의로 잡혀 오는 사람이 많았다. 1624년 1월 문회·허통·이우 등이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정충신·기자헌 등이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했다. 조사 결과 무고로 드러났으나 집권층은 이괄을 잡아 와 국문하자고 주장했다. 인조는 이 주장은 물리쳤지만, 이괄의 외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에 보냈다. 아들이 역모로 죽으면 자신도 무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괄은 사자들을 베고 군사를 일으켰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반란을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보다 집권층의 의심이 빚어낸 우발적 반란으로 본다.
전개
이괄은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구해 내 함께 반란군을 지휘했다. 한명련은 작전에 능해 두 사람은 긴밀하게 협력했다. 음력 1월 22일 이괄은 항왜병(투항한 일본군) 100여 명을 선봉으로, 1만여 명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했다.
반란군은 평양을 피해 개천·자산을 거쳐 1월 26일 강동 신창에 주둔했고, 28일 삼등을 지나 상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 관군과 맞붙은 황주 신교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이돈이 처형되었다. 반란군의 행군 속도가 워낙 빨라 관군은 그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이괄은 평산의 방비가 엄하다는 것을 알고 봉산 고읍에서 전탄을 건너 샛길로 나아가 예성강 상류 마탄에서 다시 관군을 격파했다. 이어 개성을 지나 임진을 지키던 관군을 기습해 무너뜨리자, 인조와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공주로 피난했다.
음력 2월 11일 반란군은 서울에 들어와 경복궁 옛터에 진을 쳤다. 이괄은 선조의 아들 흥안군 이제를 왕으로 세우고 방을 붙여 도성 백성을 안심시키는 등 새 행정 체제를 갖추려 했다.
그 사이 도원수 장만과 각지 관군은 반란군을 뒤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렀고, 논의 끝에 지형이 유리한 길마재(안현)에 진을 쳤다. 이괄은 군대를 두 길로 나누어 관군을 에워싸 공격했지만 크게 패했다. 그날 밤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 수백 명을 이끌고 수구문(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로 달아났다. 관군이 추격하자 반란군은 흩어졌고,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들이 배반해 이괄과 한명련 등의 목을 베었다.
결과
이괄 등의 수급이 공주 행재소에 전해진 뒤 인조는 음력 2월 22일 서울로 돌아왔다. 조정은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책봉했다.
영향
- 국내 반란으로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피난한 일은 처음이어서 집권층과 백성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후 집권층의 사찰과 감시가 강화되면서 민심이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했다.
- 북방 방어의 핵심 병력이 반란에 휘말려 크게 소모되었다.
-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달아나 조선의 불안한 사정을 알리며 침공을 부추겼고, 이는 1627년 정묘호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설·논쟁
- 반란 동기: 논공행상 불만에 따른 계획적 반란이라는 통설과, 집권층의 의심과 압박이 부른 우발적 반란이라는 견해가 맞선다.
- 병력: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만여 명, 위키백과는 1만 2천여 명으로 적는다.
- 날짜: 이괄의 죽음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2월 15일 밤, 위키백과는 2월 14일로 적는다. 안현 전투도 입성 당일인지 이튿날인지 서술이 엇갈리는데, 『인조실록』은 2월 11일 조에 안현 승전 기사를 싣고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280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