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회 사건
1981년 충남 금산 출신 교사·경찰관·군인·공무원 등이 한 아기의 백일잔치에 모였다는 사실이 반국가단체 '아람회' 결성으로 조작된 사건이다. 2009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시작~종료 1981년 5월 17일 ~ 2015년 3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12:0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아람회 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의 공안 당국이 교사, 현직 경찰관과 군인, 검찰청 직원, 새마을금고 직원, 대학생 등을 국가 변란을 꾀한 반국가단체 '아람회'의 조직원으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아람회'라는 이름은 관련자들이 마지막으로 함께 모였던 자리가 1981년 5월 17일 김난수 대위의 딸 아람의 백일잔치였다는 데서 붙었다. 관련자 대부분은 충남 금산 출신으로 금산고등학교 동문이거나 선후배 사이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처벌한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고, 2009년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배경
관련자들은 같은 지역 출신으로 유신 체제와 군사정권을 비판해 온 사람들이었다. 1980년 이후 이들은 5·18 광주 진압의 실상을 알리는 조선대 학생회 명의의 유인물과 '서울대 반파쇼 학우 투쟁 선언' 등을 등사해 돌렸고, 1980년 '서울의 봄' 때는 연금에서 풀려난 김대중을 찾아가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따로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알음알음 아는 사이"였을 뿐이라고 말한다(주간경향 2009).
경과
발단은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황보윤식이 수업 중 광주 사태의 책임이 전두환에게 있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를 들은 학생들의 이야기가 다른 교사를 거쳐 경찰에 신고되었고, 정보는 치안본부와 안기부로 전달되었다. 1981년 7월 16일 황보윤식은 학교에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남자들에게 끌려가 충남도경 대공분실에서 32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서울의 교사 정해숙은 금산읍의 다방에서, 새마을금고 직원 이재권(일부 보도는 이재곤)은 대전의 여관에서 연행되는 등 관련자들이 잇달아 영장 없이 끌려갔고, 김난수 대위는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피해자들은 물고문과 구타를 당했다고 진술했다. 수사 과정에서 조직명은 처음 다른 이름이 거론되다가 수사 말미에 '아람회'로 정해졌다고 한다. 학생 '신고자'들도 여관에 갇혀 진술 연습을 해야 했고,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은 학생은 다시 불법 구금되었다는 증언도 있다(주간경향 2009).
재판
- 1심(1982년 2월, 대전지방법원):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해 유죄를 선고했다. 최고형은 징역 10년이었다. 배석 판사였던 이인제(뒤에 국회의원)는 1997년 대선 후보 토론 등에서 "말석 판사여서 영향을 미칠 위치가 아니었지만 아픔을 같이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항소심(서울고등법원): 국가보안법상 '국가 변란 목적'이 인정되려면 정부 전복 후 새 정부 수립에 대한 구체적 구상이 있어야 한다며 반국가단체 구성 부분을 무죄로 판단하고, 반공법·집시법 위반만 유죄로 인정해 박해전 징역 6년 등을 선고했다.
- 상고심(1982년 10월 19일, 대법원): 피고인들이 정부 전복 목적과 방법, 역할 분담을 정한 뒤 계 형식으로 위장한 비밀결사를 만들었다며 원심을 깨고 돌려보냈다.
- 환송심과 확정: 서울고법은 박해전 징역 10년, 황보윤식 징역 7년, 정해숙 징역 5년 등으로 형을 높였고, 대법원이 1983년 6월 22일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진상 규명과 재심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7월 이 사건이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처벌한 사건이라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재심 등 조치를 권고했다. 위원회는 1심 법원이 임의성 없는 자백에 의존해 증거재판주의를 어겼고, 대법원이 무죄 판단을 뒤집어 중형으로 이끈 것은 사법부의 책무를 저버린 일이라고 지적했다. 재심 법정에서 당시 수사관 한 사람은 수사 지휘부가 이적단체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수사를 몰고 갔다고 보았다고 증언했고, 다른 수사관은 피의자의 머리를 몽둥이로 때린 사실을 시인했다. 2009년 5월 21일 서울고등법원은 불법 연행·구금과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하면서 "선배 법관들을 대신해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고 밝혔다. 사건 28년 만이었다. 고문 후유증을 앓던 이재권은 재심 무죄를 보지 못하고 1998년 세상을 떠났다.
배상
피해자와 가족이 낸 위자료 소송에서 1심은 국가가 184억 원을 배상하라고 했고, 2010년 3월 9일 서울고법 민사합의11부는 약 200억 원으로 판단했다. 이후 대법원은 2011년 지연이자 기산점을 바꾸어 배상액을 크게 줄였다. 피해자들이 실직 피해 등을 이유로 별도로 낸 소송에서는 대법원 2부가 2015년 3월 초, 피해자들이 이미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보상금을 받아 '재판상 화해'가 성립했다며 소송을 각하했다. 피해자 단체는 이 판결에 강하게 반발했다.
영향과 의의
아람회 사건은 백일잔치 같은 사적인 모임까지 반국가단체 결성으로 둔갑시킨 1980년대 초 공안 조작의 상징적 사례다. 경찰의 1계급 특진 같은 포상 관행 속에서 대공 기관들이 경쟁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검찰과 법원이 이를 방조했다는 비판의 대표 사례로 부림 사건, 오송회 사건, 한울회 사건 등과 함께 거론된다. 또한 재심 무죄 이후 소멸시효와 보상금 수령을 이유로 국가배상이 제한된 대표 사례로서 과거사 배상 논쟁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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