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륜
소륜(蕭綸, 507년? ~ 551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황족이다. 자는 세조(世調)이고 소자(小字)는 육진(六眞)이다. 양 무제의 여섯째 아들이다.
출생~사망 507년 ~ 551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2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507년 ~ 551년
- 출생
- 507년?
- 사망
- 551년
- 성별
- 남성
- 국적
- 양나라
- 직업
- 황족
소륜(蕭綸, 507년? ~ 551년1)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황족이다. 자는 세조(世調)이고 소자(小字)는 육진(六眞)이다. 양 무제의 여섯째 아들이다.
생애
박학했고 글을 잘 지었다. 514년 음력 7월 29일에 소릉군왕(邵陵郡王)에 봉해졌고 영원장군(寧遠將軍)을 맡았다. 이후에 강주자사(江州刺史)를 맡았다.
525년에 소륜이 섭남서주사(攝南徐州事)를 맡았는데, 주에 있는 동안 기뻐함과 화를 냄이 일정하지 않았으며 불법을 자행했다. 어느 날엔 시장과 마을에 놀러 나갔다가 생선 파는 사람에게 자사는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조급하고 포학하다고 하였다. 소륜이 화가 나서 그에게 생선을 삼키도록 하여 죽게 하니, 백성들이 두렵고 놀라워서 도로에서 눈짓만 할 뿐이었다. 또한 일찍이 상여를 만나자 효자의 상복을 빼앗아 입고 엎드려 기면서 소리 높여 울었다. 수발관은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은밀히 무제에게 보고했다. 무제가 비로소 소륜을 엄하게 꾸짖었으나 고칠 수 없어서 이에 임시로 대리인을 파견했다.
소륜의 패역하고 오만함은 더욱 심하였고, 마침내 무제와 비슷한 작고 바짝 마른 한 노인을 찾아가지고 곤룡포와 면류관을 입히고 씌워서 높은 자리에 안치하고 조현하며 무제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무죄라고 진술했다. 그런 다음에 그에게 자기 자리 있는 곳으로 오게 했는데 갑자기 그의 의복을 찢고서 마당에서 그에게 매질을 했다. 또한 새 관을 만들어 사마 최회의(崔會意)를 넣어 두고 상여과 만가(挽歌)를 가지고 상여를 떠나보내는 모양을 하였으며 한 노파를 시켜 수레에 올라가서 슬프게 통곡하게 했다. 최회의는 견딜 수가 없어서 경무장한 말을 타고 수도로 돌아가서 이를 보고했다. 무제는 소륜이 재빨리 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금병을 시켜 소륜을 체포한 뒤 장차 옥에서 죽게 하려고 했는데, 황태자 소통이 눈물을 흘리며 굳게 간청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결국 음력 12월 18일에 무제가 소륜을 관직에서 파면시키고 작위와 봉토를 삭탈했다. 그러나 이후에 다시 모두 회복시켜주고 서중랑장(西中郞將)과 남연주(南兗州)자사로 삼았다.
526년 음력 4월 17일에 양주(揚州)자사였던 소굉이 죽자 무제는 소륜에게 남연주자사 대신 양주자사로 삼았다.
532년 음력 2월 어느 날에 소륜이 사람을 보내서 사장에 가서 무늬가 있는 비단과 면포 수백 필을 외상으로 사도록 하자, 시장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가게를 닫고 나오지 않았다. 소부승(少府丞) 하지통(何智通)이 사실에 의거하여 상주문으로 보고했다. 소륜은 무제에게 질책을 당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졌으나 마침내 방합(防閤) 대자고(戴子高) 등을 보내서 도시의 거리에서 삭(槊, 길이가 1장 8척인 긴 창)으로 하지통을 난자했는데 창날이 등을 뚫고 나왔다. 하지통은 소륜의 신하인 대자고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피를 받아서 손가락으로 수레의 벽면에다 '소릉(邵陵)'이라고 쓰고 죽었다. 마침내 이로 인하여 일이 발각되었으며 음력 2월 15일에 소륜이 연루되어 파면되고 폐서인되었으며 집에 자물쇠로 감금되었으나 20일이 지나자 자물쇠가 벗겨지고 얼마 후 봉작이 복구되었다.
무제의 나이가 높았으므로 여러 아들들이 마음속으로 서로 낮추려고 하지 않자 무제는 546년 음력 7월에 소륜을 단양윤(丹陽尹)으로 삼고 소역을 강주(江州)에 있게 하며 소기를 익주(益州)에 있게 했지만 모두 권력이 인주(人主)와 같았다. 황태자 소강은 이를 싫어하여 항상 정예병을 뽑아 동궁을 지키게 했다. 음력 8월에 무제가 소륜을 남서주(南徐州)자사로 삼고 그 치소인 경구(京口)로 보냈다.
548년에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소륜은 군사를 이끌고 가다가 종리(鍾離)에 이르렀으며, 후경이 이미 채석(采石)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서 주야로 두 배의 속도로 길을 달려 군대를 돌려서 건강에 들어가 구원했는데, 장강을 건널 때 중간에서 바람이 일어나 사람과 말 중 물에 빠진 것이 열에 하나둘이었다. 마침내 둘째 아들인 과 소강의 아들인 등 여러 제후들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3만이 경구로부터 서쪽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후경이 군사를 파견하여 강승(江乘)에서 소륜의 군사를 막게 했다. 조백초(趙伯超)가 황성(黃城)대로를 따라가 적을 만나지 말고 지름길로 종산(鍾山)을 향하여 돌연히 광막문(廣莫門)을 점거하여 건강의 포위를 풀자고 하니 소륜이 이를 좇았는데, 야간에 행군하다가 길을 잃어서 20여 리를 돌아서 음력 12월 23일 아침에 장산(蔣山, 종산)에 군영을 마련했다. 후경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서 석두(石頭)에서 약탈한 부녀와 재화를 다 배에 싣고서 달아나려고 했고,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소륜을 공격했는데 소륜이 싸워서 이를 다 격파했다. 이때 산꼭대기는 춥고 눈이 와서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애경사(愛敬寺)로 내려왔다. 후경은 건강 북부의 복주산(覆舟山) 북쪽에 군사를 늘어놓았는데 28일에 소륜이 군사를 현무호(玄武湖) 옆으로 전진시키고 후경과 대진했으나 싸우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후경이 다음날에 싸우기로 약속하니 소륜이 이를 허락했다. 소륜의 군중에 있던 안남후(安南侯) 소준(蕭駿)은 후경의 군사가 물러나는 것 보고 달아나는 것으로 여기고 즉시 장대한 무사들과 더불어 그들을 쫓았는데, 후경이 군사를 돌이켜 반격하자 소준은 패하여 달아나고 소륜의 군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백초가 멀리서 보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니 후경은 승세를 타고 쫓아가 이들을 공격하여 여러 군사는 모두 무너졌다. 소륜이 나머지 군사를 모으니 천 명 가까이 되자 천보사(天保寺)에 들어갔는데 후경이 그를 쫓아가서 절을 불태웠다. 이에 소륜은 주방(朱方)으로 달아나는데 병사들은 얼음과 눈을 밟았고 때때로 동상 때문에 발을 절단했다. 이후에 소륜은 다시 경구로 퇴각했다. 후경은 소륜의 치중을 다 거두고 소대춘 등 여러 제후들 중 일부를 잡아갔다. 29일에 후경이 붙잡은 소륜이 거느렸던 군사의 수급과 포로 그리고 갑옷과 병장기 및 소대춘 등을 성 아래에 늘어놓고 말을 시켜서 소륜은 이미 난군에게 피살되었다고 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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