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올림픽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24회 하계 올림픽으로, 냉전기 보이콧을 넘어 동서 양 진영이 함께 참가했으며 한국은 종합 4위를 차지하였다.
시작~종료 1988년 9월 17일 ~ 1988년 10월 2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서울 올림픽(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은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16일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열린 하계 올림픽이다. '화합·전진'을 표어로 내걸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60개국이 참가해 당시까지 올림픽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개·폐회식과 육상·축구는 잠실의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렸다. 마스코트는 상모를 쓴 아기 호랑이 '호돌이'였다.
유치
올림픽 유치는 1979년 9월 국민체육심의위원회의 결의와 정부 승인, 10월 서울시장의 유치 계획 발표로 시작되었다. 1980년 12월 서울시가 IOC에 후보 도시로 신청했고, 정주영을 위원장으로 한 민간 추진위원회가 서독 바덴바덴 현지에서 유치 활동을 벌였다. 1981년 9월 30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 총회에서 서울은 일본 나고야를 52 대 27로 이기고 개최권을 얻었다. 1986년에는 서울 아시아 경기 대회가 열려 대회 운영을 시험하는 무대가 되었다.
냉전과 남북 문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 등 서방 60여 개국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소련 등 동구권이 불참해 반쪽 대회가 되었다. 분단국가에서 열리는 서울 대회에도 같은 우려가 있었으나, 소련과 중국, 동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참가하면서 12년 만에 동서 진영이 함께하는 대회가 되었다.
북한은 공동 개최를 요구하였다. 1985년부터 IOC 중재로 스위스 로잔에서 남북 체육 회담이 열렸고, 한국과 IOC는 일부 종목의 평양 분산 개최를 제안했으나 북한은 대회 명칭과 종목 배분, 개·폐회식 분리 등을 고집해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다. 결국 북한은 불참했고 쿠바·에티오피아·니카라과·알바니아·세이셸 등도 참가하지 않았다. 대회를 10개월 앞둔 1987년 11월에는 북한 공작원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경찰과 군 등 약 11만 2천 명의 안전 특수 임무 부대가 300여 개 대회 시설에 배치되었다.
대회
9월 17일 개회식은 오전 10시 30분 한강에서 펼쳐진 강상제로 시작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이 성화를 들고 주경기장에 들어섰고, 한 초등학생이 굴렁쇠를 굴리며 텅 빈 경기장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대회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남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하였다.
남자 육상 100m에서 캐나다의 벤 존슨이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으나 도핑 검사에서 금지 약물이 검출되어 금메달과 기록이 취소되었고, 금메달은 미국의 칼 루이스에게 돌아갔다. 이 사건은 올림픽 도핑 문제를 세계에 각인시켰다. 태권도는 이 대회에서 처음 시범 종목으로 치러졌다.
한국의 성적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4위에 올라 당시까지 한국 올림픽 사상 최고 성적을 냈다. 양궁에서 김수녕이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땄고, 탁구 남자 단식에서는 한국 선수끼리 결승을 치러 유남규가 우승하였다. 레슬링, 복싱, 핸드볼(여자) 등에서도 금메달이 나왔다.
재정과 시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개최가 확정된 뒤 7년 동안 대회 직접 사업비 1조 1,084억 원과 올림픽대로, 한강 종합 개발, 김포 공항 확장 같은 여건 조성 사업비 1조 2,742억 원 등 모두 2조 3,826억 원이 투입되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가 2,520억 원의 흑자를 냈다고 발표했으나, 여기에는 정부 출연금과 아파트 분양 기부금, 국민 성금 등 기부금 2,341억 원이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대회 이익은 179억 원 정도였다고 평가된다. 주 수입원은 텔레비전 방영권료(2,188억 원)였다. 선수촌에는 1만 3,626명이 묵었으며, 잠실 일대와 송파구 올림픽공원, 올림픽대교 등이 대회 기념 시설로 남았다. 대회가 끝난 뒤 10월 15일부터는 같은 시설에서 서울 패럴림픽이 열렸다.
참가 규모의 이설
참가국 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한국어 위키백과 모두 160개국으로 적고 있다. 출전을 신청한 161개국 가운데 마다가스카르가 막판에 빠졌다고 한다. 참가 선수 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한국어 위키백과는 약 8,400명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선수·임원을 포함한 선수촌 투숙 인원을 1만 3,626명으로 적고 있다.
영향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국제적 위상을 세계에 알린 계기로 평가된다. 대회를 앞두고 국제 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 당시 정부가 군 투입을 자제하고 6·29 선언을 내놓는 데 영향을 주었다는 분석도 있다. 대회를 계기로 동구권 국가와의 교류가 늘어 1989년 헝가리·폴란드 등과 수교가 이루어졌고, 이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와 1990년 소련, 1992년 중국과의 수교,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으로 이어졌다. 한편 대회 준비 과정의 도시 정비와 노점·철거민 문제 같은 그늘도 함께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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