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건국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원전 18년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남쪽 위례성에 도읍하고 십제(뒤의 백제)를 세웠다. 비류 시조설·구태 시조설 등 이설이 있고,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중후반에 국가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시작 기원전 18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목차
개요
백제 건국은 부여·고구려 계통의 온조(溫祚)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운 일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그 해를 한 성제 홍가(鴻嘉) 3년, 곧 기원전 18년으로 적었다. 백제는 처음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출발해 주변 소국을 통합하며 성장했고,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지도 표지는 하남위례성(한성)으로 유력하게 비정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 토성에 두었다. 연도는 『삼국사기』의 전통적 연대다.
『삼국사기』의 건국 전승
온조 시조설(본문)
주몽이 북부여에서 졸본부여로 피해 오자,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이 둘째 딸을 주몽에게 시집보냈고 주몽은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를 낳았는데,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유리)이 와서 태자가 되자, 두 형제는 받아들여지지 못할까 두려워 오간·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떠났고 많은 백성이 따랐다.
이들은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폈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기를 원했다. 열 신하는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띠고, 동쪽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며 이곳에 도읍할 것을 권했으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 일대)로 갔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하고 열 신하의 보좌를 받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 라 했다.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살기 어려웠으므로, 비류는 위례성이 안정된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다 죽었고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이에 처음 올 때 백성이 즐거이 따랐다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 로 고쳤다. 왕실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비류 시조설(주석)
『삼국사기』는 다른 전승도 실었다. 시조는 비류왕이며, 그 아버지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優台),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였다. 우태가 죽은 뒤 소서노가 주몽과 재혼하여 고구려 건국을 크게 도왔으나, 유리가 태자가 되자 비류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온조와 함께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구태 시조설
『북사』와 『수서』 등 중국 사서는 동명의 후손 구태(仇台)가 대방 옛 땅에서 나라를 세웠고, 요동 태수 공손도가 딸을 시집보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적었다. 김부식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초기의 발전(『삼국사기』)
온조는 즉위 이듬해 동명왕 사당을 세웠고, 북쪽의 말갈과 동쪽의 낙랑에 맞서 성책을 쌓았다. 기원전 6년(온조왕 13)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마한에 알렸으며, 이때 강역을 북으로 패하, 남으로 웅천, 서로 큰 바다, 동으로 주양까지로 정했다고 한다. 서기 8~9년(26~27년)에는 사냥을 핑계로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병합했다는 기사가 있다.
역사학계의 해석
건국 연대
- 『삼국지』의 백제국: 3세기 중엽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마한 54국 가운데 하나로 '백제국(伯濟國)'을 적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기원전 18년의 '건국'은 한강 유역의 한 소국이 성립한 시점을 전하는 것이고, 백제가 고대 국가로 성장한 것은 그 뒤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 고이왕 획기설: 3세기 고이왕(재위 234~286) 때 관등과 관직을 정비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이때를 실질적 국가 성립의 획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 고고학적 연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 항목은 백제 토기가 3세기 중반 무렵 성립하고 풍납토성 같은 대규모 성곽이 3세기 중·후반에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국가로서의 건국을 3세기 후반으로 보는 견해를 소개한다. 반면 풍납토성 하층에서 기원 전후의 유물이 나왔다는 점을 들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더 신뢰하는 견해도 있다.
- 마한 병합 기사(서기 8~9년)는 4세기 근초고왕 대의 일이 앞당겨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위례성의 위치
『삼국사기』에는 온조가 처음부터 하남 위례성에 도읍했다는 본문과, 하북 위례성에서 하남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함께 있다. 하북 위례성을 서울 강북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고고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남 위례성은 1990년대 말 이후 발굴된 풍납토성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며, 몽촌토성을 함께 한성 도읍의 구성 요소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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