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등
마등(馬騰, 152년 ~ 212년)은 중국 후한 말의 군웅으로 자는 수성(壽成)이며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후한의 개국 공신 마원(馬援)의 후손이다. 관서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중앙 정부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세력을 장남 마초에 맡기고 일족들과 조정으로 들어갔다가 마초의 난에 연좌되어 조조에게 숙청되었다.
출생~사망 156년 ~ 212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6
마등(馬騰, 152년 ~ 212년)은 중국 후한 말의 군웅으로 자는 수성(壽成)이며 사례 우부풍 무릉현(茂陵縣) 사람이다. 후한의 개국 공신 마원(馬援)의 후손이다.
관서 일대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중앙 정부와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세력을 장남 마초에 맡기고 일족들과 조정으로 들어갔다가 마초의 난에 연좌되어 조조에게 숙청되었다.
행적
아버지 마평(馬平)은 일찍이 천수의 난간위(蘭干尉-양주 천수군 난간현의 현위)를 지냈는데 그 후 관직을 잃고 이로 인해 (그대로) 농서(隴西)에 머물며 강족(羌)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집안이 가난해 처가 없었는데, 나중에 강족의 여인(羌女)에게 장가들어 마등을 낳았다.
어려서는 가난해 가산이 없어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코가 남달리 크고 키가 약 8척이며 체격이 건장하고 성정이 어질고 온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경했다.
후한 영제 말기인 184년에, 양주자사 경비(耿鄙)가 실정하여 한수(韓遂) · 왕국(王國)이 강족(羌族) · 저족(氐族)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 중에서 토벌병을 모았는데, 마등은 여기에 응모하여 군종사가 되었고 공을 세워 군사마가 되었다. 경비가 피살된 후에는 반란군에 가담하여 한수와 함께 왕국을 주군으로 모셨으나, 반란군이 황보숭(皇甫嵩)에게 패배하고 한수가 왕국을 죽이면서 반란은 와해되어버렸다. 마등은 이후 편장군이 되었고, 정서장군으로 승진하였다. 초평(初平) 연간에 정동장군에 임명되었다.
192년 동탁(董卓)이 암살된 이후 이각(李傕) · 곽사(郭汜) · 장제(張濟) · 번조(樊稠)가 조정을 장악하자, 한수와 함께 순복하여 정서장군이 되고 미(郿)에 주둔했다.
194년에 시중 마우, 간의대부·전 익주자사 충소, 좌중랑장 유범(劉範) 그리고 유언(劉焉)과 함께 이각과 곽사 등을 무찌를 모의를 하고 한수와 함께 장평관까지 진격했으나, 계획은 들통났고 마등은 한수와 함께 이각 · 곽사와 싸워 져 양주로 달아났다.
양주로 돌아온 후에는 한수와 친밀하게 되어 서로 의형제를 맺었으나, 곧 사이가 벌어져 마등은 한수를 쳤고, 한수는 달아났다가 돌아와 마등의 처자를 죽였다. 종요(鍾繇)가 사례교위가 되어 양주목 위단과 함께 마등과 한수를 설득하여 화해하게 하니, 둘은 조정으로 자기 아들을 출사시켰다. 마등은 자신의 아들인 마초를 보내 원상(袁尙)의 장수 곽원(郭援)과 싸우게 했다. 마등은 괴리에 주둔하였으며, 전장군·가절에 임명되었고 괴리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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