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
822년(헌덕왕 14) 3월 웅천주 도독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으로,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신라 9주 가운데 4주를 장악했으나 웅진성 함락과 김헌창의 자결로 진압되었다.
시작 822년 3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상세 타임라인
개요
김헌창의 난은 822년(헌덕왕 14) 음력 3월, 웅천주(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도독 김헌창이 신라 조정에 맞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김헌창은 새 정부를 세워 국호를 장안(長安),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였다. 반란 세력은 지금의 충청·전라·경상도 일부를 순식간에 장악했으나, 중앙의 토벌군이 거점인 웅진성을 함락하고 김헌창이 자결하면서 한 달이 안 되어 진압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난을 원성왕계와 무열왕계 귀족 사이의 제2차 왕위 계승 쟁탈전으로 규정한다.
배경
김주원의 즉위 좌절
『삼국사기』는 김헌창이 아버지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한다. 무열왕계의 가장 유력한 왕족이던 김주원은 785년 선덕왕이 죽은 뒤 귀족 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큰비로 알천의 물이 불어 김주원이 궁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이 김경신이 먼저 즉위하여 원성왕이 되었고, 김주원은 명주(지금의 강릉)로 물러났다.
김헌창의 지방 전출
김헌창은 그 뒤에도 중앙에서 활동하여 807년(애장왕 8)에는 시중이 되었다. 그러나 809년 상대등 김언승이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으로 즉위하자 이듬해 시중에서 물러났다. 이후 813년 무진주 도독, 816년 청주(菁州, 진주) 도독, 821년 웅천주 도독으로 계속 지방에 머물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김주원의 즉위 좌절을 내세운 것이 원성왕계 왕실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옛 김주원 지지 세력의 호응을 끌어내려는 명분이었다고 해석한다.
전개
반란의 확산
웅천주에서 군사를 일으킨 반란 세력은 무진주(광주)·완산주(전주)·청주(진주)·사벌주(상주) 등 4개 주를 장악하고, 국원경(충주)·서원경(청주)·금관경(김해)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시켰다. 9주 가운데 4주에 해당하는 범위로, 충청도 거의 전역과 경상도 서부·남부, 전라도의 전주·광주 일대가 포함되어 수도 서라벌을 둘러싸는 형세였다. 이렇게 넓은 지역이 한꺼번에 넘어간 것은 각지에 내통한 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반란에 동조하지 않은 관리들은 탈출하여 중앙에 알렸다. 청주 도독 향영은 추화군(지금의 밀양)으로 몸을 피했다. 삽량주 추화군 굴자현(지금의 창녕)은 반란에 휩쓸리지 않은 공으로 진압 후 7년간 조세를 면제받았다.
토벌군의 출동
조정은 먼저 원장 8명을 보내 왕도의 여덟 방면을 지키게 하였다. 이어 일길찬 장웅을 선발대로,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을 후속 부대로 보내고, 이찬 균정, 잡찬 웅원, 대아찬 우징에게 주력 3군을 맡겼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관문을 지키게 하였고, 화랑 2명이 낭도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원성왕 직계 후손들의 결속이 진압의 원동력이었다고 평가한다.
진압
김헌창은 요지마다 병력을 배치하고 맞섰다. 그러나 장웅의 부대가 도동현에서 삼년산성(지금의 보은) 방면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위공·제릉의 부대와 합세하여 삼년산성을 함락시켰으며 속리산의 반란군도 섬멸하였다. 균정 등이 이끈 주력군은 성산(지금의 성주)의 반란군을 무찔렀다. 토벌군에 포위된 웅진성은 10일 정도 버티다 함락되었고, 김헌창은 함락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과
- 김헌창의 시신은 다시 베어졌고, 그의 종족과 도당 239명이 처형되었다. 반란군에 병졸로 동원된 일반 백성은 풀려났다.
- 처형은 반란에 직접 가담한 친척에 한정되어, 가담하지 않은 김헌창 형제의 자손 등은 이후에도 정계에서 활동하였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을 옹립한 김양도 이 집안 출신이다.
- 김헌창의 아들 범문은 진압 과정에서 몸을 피했다가 825년(헌덕왕 17) 고달산의 산적 수신과 함께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영향과 의의
이 난을 계기로 무열왕계 귀족은 크게 몰락하여, 이후 중앙 정계를 주도하지 못하고 원성왕계 각 파벌에 가담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동시에 지방관이 지방 세력을 규합해 중앙에 맞설 수 있음을 드러내, 신라 하대 지방 세력의 이탈과 후삼국 분열을 예고한 사건으로도 평가된다.
이설·논쟁
옛 백제의 중심지인 웅천주에서 부임 1년도 안 되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백제 지역의 오랜 반신라 정서 때문이라 보고, 이 난을 백제 권역에 새 나라를 세우려 한 시도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범문이 한산(지금의 서울 일대)을 근거로 다시 일어난 것도 옛 고구려 권역의 호응을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덧붙여진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1:12 · r136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