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또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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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삼국 시대에 제작된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또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1962년 12월 20일에 대한민국의 국보 제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6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1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반가(半跏)의 자세로 앉아서 왼손을 오른쪽 다리 위에 두고 오른쪽 팔꿈치는 무릎 위에 붙인 채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상을 하고 있는 불상을 일반적으로 반가사유상이라고 부른다.
본래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의 불교조각실 (301호)에 국보 반가사유상 전용전시실이 마련되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제83호)과 함께 번갈아 전시되었으나, 상설전시관 2층에 '사유의 방'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2021년 11월 12일부터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2 또한 2017년 6월에는 표면 부식을 막고 균열 부위를 보강하는 보존처리를 마쳤으며, 안정화 처리 과정에서 표면을 덮은 이물질이 제거돼 불상의 새김문양을 한층 분명하게 드러냈다. 오른쪽 어깨 부근 옷자락 일부와 보관 솟음장식의 균열부도 보강하였다.3
반가 사유상
반가사유상은 불전(佛典)의 내용 중에서 석가가 태자였을 때 궁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안락하게 살아가고 있다가 어느 날 궁전 밖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고통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인생에 무상함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중생들은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고뇌하는 태자사유상(太子思惟像)에서 유래된 도상이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을 '미륵보살(彌勒菩薩)'로 부르게 된 것은 일본 야츄지(野中寺)에 있는 666년에 조성되었다고 하는 반가사유상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반가사유상이 대부분 '태자사유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간혹 '용화수사유상(龍華樹思惟像)'이라는 명문도 발견되고 있다. 이 용화수란 석가불(釋迦佛)의 제자로서 미래에 성불(成佛)하리라는 언약을 받고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있는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난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남아 있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화수 밑에서 세 번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불의 하생(下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 근교에 있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중에 반가사유상이 '미륵석상'이라는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또 신라에서는 청년 귀족 집단인 화랑 제도와 미륵신앙을 연결시켜 흔히 '미륵보살반가상' 이라고 불렀다. 특히 삼국 시대인 6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중기까지 많은 반가사유상이 금동 또는 석조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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