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국내성 천도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 22년(서기 3년) 10월 고구려가 졸본에서 압록강 중류의 국내(지금의 중국 지린성 지안)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국내성은 427년 평양 천도까지 고구려의 도읍이었다.
시작 3년 10월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개요
고구려 국내성 천도는 유리명왕(유리왕)이 고구려의 도읍을 졸본에서 국내(國內) 로 옮긴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유리왕 22년(서기 3년) 겨울 10월에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고 적었다(날짜는 음력). 국내는 압록강 중류 북안의 오늘날 중국 지린성 지안(集安)시 일대로, 이후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백여 년 동안 고구려의 중심이었다.
지도 표지는 지안 시내에 성벽이 남아 있는 국내성 유적에 두었다. 위나암성은 국내성 북쪽 산성자산의 산성(뒤의 환도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경위
돼지를 쫓다 찾은 땅
『삼국사기』에 따르면 유리왕 21년(2) 봄 3월, 하늘에 제사 지낼 돼지가 달아나자 왕은 희생을 맡은 관리 설지(薛支)에게 쫓게 했다. 설지는 국내의 위나암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그곳 민가에 맡겨 기르게 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신이 돼지를 쫓아 국내 위나암에 이르렀는데, 산수가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기르기에 알맞고 사슴·물고기·자라 같은 산물도 많았습니다. 왕께서 도읍을 옮기시면 백성의 이로움이 끝이 없을 뿐 아니라 전쟁의 걱정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의 답사와 천도
그해 가을 9월 왕은 몸소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폈다. 이듬해(3) 겨울 10월, 마침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천도 직후인 12월 왕이 질산 북쪽으로 사냥을 나가 닷새 동안 돌아오지 않자 대보(大輔) 협보(陜父)가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사냥에만 몰두하신다"고 간언했다. 왕은 크게 노하여 협보를 파직하고 관원(官園)을 맡게 했고, 협보는 분하여 남한(南韓)으로 떠났다. 『삼국사기』의 이 일화는 천도 초기의 불안한 정국을 보여 준다.
국내 지역의 입지
- 농업·교통: 국내는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분지로, 산에 둘러싸인 고구려 지역에서는 드물게 넓은 평지가 있다. 압록강 수운으로 하류의 서해와 연결되고, 육로로는 혼강 유역의 졸본 및 요동 방면과 이어진다.
- 방어: 평지의 국내성과 배후 산지의 산성(위나암성·환도성)이 짝을 이루는 '평지성+산성' 체계는 고구려 도성의 특징으로, 평소에는 평지성에 살다가 위기 때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는 방식이었다.
- 세력 확대: 졸본에서 압록강 중류로 중심을 옮긴 것은 압록강 유역의 여러 집단을 통합하고 현도군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후의 도읍
- 산상왕 2년(198) 환도성을 쌓고, 13년(209) 10월 환도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사가 있다.
- 244~245년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으로 환도성이 함락·파괴되자, 동천왕은 247년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이 평양성의 위치는 국내성 부근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 342년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 직전 고국원왕은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았으며, 침입 뒤 343년 평양 동황성으로 옮겨 머물렀다.
- 이처럼 도읍 기사는 복잡하지만, 국내 일대는 427년 평양 천도 때까지 고구려 왕권의 중심 무대였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 등 왕릉급 무덤도 이 일대에 있다. 국내성·환도산성과 주변 고분군은 2004년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묘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설·논쟁
- 천도 시기: 『삼국사기』의 서기 3년 천도를 그대로 인정하는 견해와 달리, 『삼국지』 동이전이 2세기 말~3세기 초 이이모(산상왕)가 공손강의 공격을 받은 뒤 "새 나라를 세웠다(更作新國)"고 적은 것을 근거로 실제 국내 지역 천도를 3세기 초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산상왕 13년의 환도 천도 기사를 이와 연결하기도 한다.
- 국내성과 위나암성·환도성의 관계: 국내성(평지성)과 위나암성·환도성(산성)이 같은 곳인지, 각각 어디인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삼국사기』 동천왕조 주석은 『괄지지』를 인용해 "불내성(不耐城)이 곧 국내성이며 돌을 쌓아 만들었다"고 하고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닿아 있다고 적었다.
- 현재 남아 있는 국내성의 석축 성벽은 후대에 쌓은 것으로 보며, 그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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