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설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옛 땅에 낙랑·진번·임둔·현도의 4군을 설치한 일. 진번·임둔은 25년여 만에 폐지되고 현도는 서쪽으로 밀려났으며, 낙랑군만 313년까지 존속했다.
시작~종료 기원전 108년 ~ 기원전 75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한사군(漢四郡)은 기원전 108년 한(漢)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뒤 그 땅을 나누어 설치한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을 가리킨다. 한은 군 아래에 현을 두고 중앙에서 태수를 파견해 다스리려 했으나, 토착 세력의 저항으로 4군 체제는 오래 가지 못했다. 네 군이 함께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이후로는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부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지도 표지는 가장 오래 존속한 낙랑군의 치소(조선현)로 비정되는 평양 대동강 남안의 낙랑토성(토성동 토성)에 두었다.
설치
『사기』 조선열전은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4군으로 삼았다"고만 적었다. 『한서』 지리지는 낙랑군을 원봉 3년(기원전 108), 현도군을 원봉 4년(기원전 107)에 열었다고 기록하여, 현도군의 설치를 1년 늦게 보는 견해가 있다.
각 군의 위치
위치 비정은 학설이 많아 확정되지 않았다. 통설은 다음과 같다.
- 낙랑군: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북부. 치소 조선현은 평양 대동강 남안. 고조선의 중심부를 계승한 군이다.
- 진번군: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의 황해도 일대로 보는 남방설이 유력하나, 압록강 중상류 등지로 보는 북방설도 있다.
- 임둔군: 함경남도 남부에서 강원도 북부(동해안)로 본다. 『삼국사기』 지리지 등에는 강릉(명주)이 본래 예국(濊國)으로 한 무제가 4군을 정할 때 임둔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현도군: 처음에는 동옥저 지역(함흥 일대)에 두었다가 고구려현 쪽으로 옮겼다는 『삼국지』 동이전 기록이 있으며, 압록강 중류~혼강 유역의 고구려현에 치소를 둔 것으로 본다.
변천
- 기원전 82년(시원 5년):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둔군을 현도군에 합쳤다.
- 기원전 75년(원봉(元鳳) 6년): 토착 세력(고구려 등 '이맥')의 저항으로 현도군 치소가 고구려현에서 서북쪽의 혼하 상류 흥경·노성 방면으로 옮겨졌다. 『삼국지』는 이를 '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다'고 적었다. 현도군이 맡던 옛 임둔 지역 일부(영동 7현)는 낙랑군으로 넘어가 동부도위가 관할했다.
- 서기 30년 무렵: 후한 광무제 때 낙랑군 동부도위가 폐지되고, 영동 7현의 토착 군장들이 현후(縣侯)로 봉해져 사실상 자치 상태가 되었다(『삼국지』 동이전 예전).
- 3세기 초: 요동의 공손씨가 낙랑군 남부를 떼어 대방군을 설치했다.
- 313~314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몰아냈다. 현도군은 고구려의 압박을 받으며 계속 서쪽으로 밀려나다가, 광개토왕 대인 404년 이전에 요동군과 함께 완전히 고구려 영역이 되었다.
통치와 사회
낙랑군은 중국식 군현 제도에 토착 사회의 읍락 질서가 섞인 형태로 운영되었다. 한인 관리와 이주민이 지배층을 이루었고, 범죄가 늘어 고조선 시기 8조였던 금법이 60여 조로 늘었다는 『한서』 지리지의 기록이 있다. 평양 일대에서는 '낙랑예관' 명 기와, 봉니, 칠기, 그리고 낙랑군 25개 현의 호구 수를 적은 목간 등이 출토되었다. 낙랑군은 주변 동이 세력을 중국 중심 질서에 편입시키는 창구였고, 한반도 남부의 삼한·왜와 중국을 잇는 교역 중심지 구실을 했다.
영향과 평가
- 한사군 설치는 토착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고조선 유민의 남하를 불러 삼한 사회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 토착 세력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진번·임둔은 일찍 폐지되었고, 현도군을 몰아낸 세력 가운데에서 고구려가 성장했다.
- 일제 강점기 관학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출발을 한사군으로 서술하며 외세에 의해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타율성론'의 근거로 삼았다. 광복 후 연구는 4군 대부분이 단기간에 소멸했고, 낙랑군도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의 좁은 지역에 머물러 통치 기구보다 교역 거점에 가까웠다는 점을 밝혀, 이러한 해석을 비판했다.
이설·논쟁
- 위치: 낙랑군을 평양 일대로 보는 통설에 대해, 한사군 전체가 요하 서쪽에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그러나 평양 일대의 낙랑 유적과 유물은 통설의 강력한 근거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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