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조성 369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6
칠지도(七支刀)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인 길이 74.9cm의 양 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로 칼에는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로 총 62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X-레이 촬영결과 앞면에 十(십)자가 숨겨져 있음이 발견되어 1자가 늘었다.) 명문(銘文)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해석 문제는 광개토왕릉비와 더불어 임나일본부설의 실재 여부를 입증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발견
이소노카미 신궁에서 ‘육차모(六叉鉾)’라는 명칭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1 1873년 신궁의 궁사에 의해 명문이 발견되었고, ‘칠지도’로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2
형태
74.9 cm 중 칼날 부분이 65cm이고 나머지는 칼자루다. 칼 좌우로 3개씩 가지가 뻗어있으며 주 몸통과 더불어 7개의 가지로 보고 칠지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에서는 이 때문에 이 칼이 실제 전투용으로서보다는 의식용으로 보고 있다.3
내용
1977년과 1978년에 찍은 확대 근접사진과 1981년 NHK에서 촬영한 X-레이 사진을 통해 보면 年(연)자와 月(월)자 사이에 十(십)자가 검출되어 그동안 五月(5월)로 보았던 명문을 十一月(11월)로 볼 수 있게 되었다.4
학자 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있지만, 대개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앞면
泰[和] 四年 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侯王□□□□作
태[화] 4년 11월 16일 병오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奇生)이 성음(聖音)으로 왜왕 지를 위해 만들게 하였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주요 연구
1945년 이전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재함으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이용되었다.5 칼이 너무 오래되어 부식되어 철의 녹과 상감의 박락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 학자들은 《》(니혼쇼키) 신공기 52년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 왕이 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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