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조
이다조(李多祚, 654년 - 707년 8월 7일)는 중국 무주(武周) ~ 당(唐)의 번장으로 상주국(上柱國)、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해졌다. 707년 황태자 이중준(重俊)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패하고 죽었다.
출생~사망 연도 미상 ~ 707년 8월 7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9
이다조(李多祚, 654년 - 707년 8월 7일)는 중국 무주(武周) ~ 당(唐)의 번장으로 상주국(上柱國)、요양군왕(遼陽郡王)에 봉해졌다. 707년 황태자 이중준(重俊)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패하고 죽었다.
개요
《신당서》(新唐書)에는 이다조의 선조가 말갈의 추장으로 황두도독(黃頭都督)이라 불렸고12 후에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는 그가 말갈인이라고 기록하면서도 사후 그를 복권하는 조서에서 "삼한(三韓)의 귀종(貴種)"이라고 적고 있는데3 1991년 낙양 용문산에서 발견된4 이다조의 묘지명 《대당고진군대장군행우림장군대장군상주국요양군왕식항주실봉팔백오십호봉왕묘지》(大唐故鎮軍大將軍行右羽林軍大將軍上柱國遼陽郡王食恒州實封八百五十戶封王墓志)에는 이다조를 개주(蓋州), 즉 옛 고구려 개모성 출신으로 기재하고 있다. 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는 이납(訥), 할아버지는 이리(利), 아버지는 이변(辯)으로 모두 오몽주도독(烏蒙州都督)이라는 관직에 있었고 아버지 이변은 사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추증되었다고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발해의 몽주·불열말갈·황두실위는 지리상 일정한 관계가 있는 것이 확인되며, 이다조는 불열말갈 출신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다조의 선조들이 말갈인임에도 불구하고, 황두도독을 역임할 수 있던 배경으로 말갈과 실위의 언어 및 풍습의 유사성을 거론할 수 있다. 이다조의 생년이 654년인 것을 고려했을 때 오몽주도독직은 최소한 이다조의 증조 대부터 역임했으므로, 이다조 일가에게 오몽주도독과 황두도독을 수여한 주체는 고구려였을 가능성이 높다.5
그는 배행검(裴行儉)의 추천으로 발탁되었으며, 수공(垂拱) 3년(687년) 왕구언(王九言)과 함께 흑치상지의 부총관으로써 출정해 튀르크의 일테리쉬 카간과 아시테 투뉴쿠크가 이끄는 튀르크군과 교전하였다. 흑치상지의 군은 튀르크군을 황화퇴(黃花堆)에서 대파하고 40리를 쫓아 그들을 적북(磧北)으로 내몰았는데, 이때 중랑장(中郎將) 찬보벽(爨寶璧)이 표문을 올려 남은 적들을 더 뒤쫓을 것을 조정에 청해 놓고 공을 독차지하려 흑치상지와 모의도 하지 않고 무리하게 진군했다가 전군이 패몰되는 참패를 겪었다. 이후 흑치상지는 혹리 주흥(周興) 등의 무고로 우응양장군(右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 등과 모반하였다는 죄로 옥에 갇혀 마침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한편 이다조는 군공으로 우응양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무주 천수(天授) 2년(691년) 흑수말갈(黑水靺鞨)과 무주 사이에 벌어졌던 무력 충돌에서 이다조는 흑수말갈의 추장을 유인해 술에 취하게 해놓고 죽이는 계략을 써서 그의 군을 패배시켰다. 원년(696년) 5월에 영주(營州)에서 거란의 (李盡忠), (孫萬榮)이 도독 조문홰(趙文翽)를 죽이고 영주를 함락시키고 무주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인사(曹仁師)、우금오대장군(右金吾大將軍) 장현우(張玄遇), 사농소경(司農少卿) 마인절(麻仁節) 등과 함께 추토에 나섰으며, 원년(698년) 8월에 의 이 앞서 무주에서 통혼을 위해 보낸 무연수가 이씨가 아님을 트집잡아 규(媯)、단(檀) 등의 주로 쳐들어왔을 때에도 사속경(司屬卿) 고평왕(高平王) 이중규(重規)、우무위위대장군 사타충의、유주도독 장인단(張仁亶)과 함께 병사 28만을 거느리고 공격하였다고 한다.(《구당서》 측천황후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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