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죽미령 전투
1950년 7월 5일 미 제24사단의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약 540명)가 경기도 오산 북쪽 죽미령에서 북한군 제4사단과 제105전차사단 소속 전차부대를 상대로 싸운 6·25 전쟁 최초의 미 지상군 전투다. 미군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시작 1950년 7월 5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상세 타임라인
개요
오산 죽미령 전투(오산 전투)는 6·25 전쟁에 투입된 미 지상군이 처음으로 북한군과 싸운 전투다. 1950년 7월 5일 미 제24보병사단 제21연대 제1대대 일부와 제52야전포병대대 A포대로 이루어진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ask Force Smith, 지휘관 찰스 B. 스미스 중령)가 오산 북쪽 죽미령 고개에 진지를 치고, 수원에서 남하하던 북한군 제4사단과 전차 부대를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대전차 무기의 열세로 전차를 막지 못하였고, 오후에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배경
미국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고, 일본 규슈에 주둔하던 제24사단을 먼저 한국에 보냈다. 제21연대 제1대대에서 차출된 스미스 부대는 7월 1일 항공편으로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하여 열차로 대전으로 올라갔다. 미군 지휘부는 미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북한군이 물러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국가기록원은 이 전투를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 제24보병사단의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오산에서 벌인 전투"로 기록한다.
병력
- 미군: 540명. 제21연대 제1대대에서 차출한 보병 406명과 제52야전포병대대 A포대 134명. 105mm 곡사포 6문, 75mm 무반동총, 2.36인치 로켓포 등을 갖추었다.
- 북한군: 제4사단 제16·18연대 보병 약 5,000명과 제105전차사단 제107전차연대의 T-34 전차 약 36대.
전개
- 7월 5일 새벽: 스미스 부대는 비가 오는 가운데 오산 북쪽 죽미령의 경부국도 양쪽 능선에 진지를 쳤다. 포병은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 7시 30분 무렵: 수원 쪽에서 북한군 전차 행렬이 다가오는 것이 관측되었다.
- 8시 16분: 미군 포병이 첫 포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폭탄으로는 T-34 전차를 멈출 수 없었고, 2.36인치 로켓포도 전차 장갑을 뚫지 못하였다. 전차 행렬은 미군 진지를 지나 오산 쪽으로 내려갔다. 대전차고폭탄(HEAT) 몇 발로 전차 일부가 파괴되거나 멈췄다.
- 11시 무렵: 전차 뒤를 이어 북한군 보병 행렬이 트럭과 함께 나타났다.
- 11시 45분: 스미스 중령은 보병 행렬을 향해 사격을 명령하였다. 북한군 보병은 곧 전개하여 미군 진지의 양 측면을 포위해 들어왔다.
- 14시 30분: 탄약이 떨어지고 포위될 위기에 처하자 스미스는 철수를 명령하였다. 철수 과정에서 혼란이 일어나 부상자와 장비 상당수를 남겨 두었다.
피해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미군은 전사 60명 안팎, 부상 20명 남짓, 포로 80명 남짓의 피해를 입었다(포로 가운데 32명이 억류 중 숨졌다). 북한군은 전사 약 42명, 부상 약 85명, 전차 4대가 파괴되거나 멈춘 것으로 추정된다.
결과와 영향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의 진격을 약 7시간 늦추는 데 그쳤다. 이 전투는 미군이 북한군 전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교훈을 남겼고, 이후 미군은 3.5인치 로켓포를 급히 들여와 대전차 전력을 보강하였다. 이어 미 제24사단은 평택·천안·조치원·금강을 거쳐 대전 전투까지 지연전을 계속하였다. 지금의 오산시 죽미령 일대에는 유엔군 초전기념관과 스미스 부대 기념비, 오산 죽미령 평화공원이 있다.
참고 자료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전 10:14 · r384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