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왕
신문왕(神文王, 665년 음력 8월 이전 ~ 692년 8월 22일, 재위: 681년 7월 30일 ~ 692년 8월 22일)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김(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이다. 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되었고, 음력 7월 2일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한 5일 후인 681년 음력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
출생~사망 661년 ~ 692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4
신문왕(神文王, 665년 음력 8월 이전 ~ 692년 8월 22일(음력 7월 2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 재위: 681년 7월 30일(음력 7월 7일, 율리우스력 7월 27일) ~ 692년 8월 22일(음력 7월 2일, 율리우스력 8월 19일))은 신라의 제31대 왕이다.
김(金)이고, 휘는 정명(政明)이며, 자는 일초(日怊) 혹은 일소(日炤)이다.1 문무왕(文武王)의 차남이며, 어머니는 자의왕후 김씨(慈儀王后 金氏)이다. 665년 8월 태자에 책봉되었고, 음력 7월 2일에 선왕(문무왕)이 사망한 5일 후인 681년 음력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삼국 통일 후에 국내의 통치 기반을 굳히고 귀족들의 노동력 징발권을 회수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2
생애
문무왕과 자의왕후 김씨의 차남으로,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장남 효소왕이 6세의 나이에 즉위한 점을 고려하면 사망 당시 장수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3 교서에 자신을 보잘 것 없는 몸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체격이 작은 편으로 추정된다. 665년 8월 동복 형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죽자 태자에 책봉되었다. 681년 8월, 왕비 김씨의 아버지인 소판 김흠돌이 김흠돌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다. 김흠돌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정희(政姬)의 아들로,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맞아들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실패하였고 처형되었다. 그의 딸 역시 폐위되었다. 즉위 한 달 만에 발생한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면서 신문왕은 진골 귀족을 숙청하였고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683년 일길찬 김흠운의 딸(신목왕후 김씨)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682년 6월, 국학(國學)을 설립4 하여 예부에 소속시키고, 공장부(工匠府)에 감(監) 1인을 두었다.
683년 10월,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보덕국의 안승에게 소판의 관직의 등급과 함께 신라 왕실의 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684년 11월, 보덕국이 지배하는 금마저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를 진압하였고 보덕국을 멸하였다.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신문왕」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r38685179)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원문 기여자 목록은 원문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4 · r40156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