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린(페르시아어: شیرین; 628년 사망)은 사산 왕조의 황제 호스로 2세(재위 590–628)의 아내였다. 호스로의 아버지 호르미즈드 4세가 죽은 뒤 일어난 혁명에서 장군 바흐람 초빈이 페르시아 제국의 권력을 장악했다. 쉬린은 호스로와 함께 시리아로 도피했으며, 그곳에서 비잔티움 황제 마우리키우스의 보호 아래 생활했다.
591년 호스로는 제국을 장악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돌아갔고, 쉬린은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새로운 영향력을 이용해 이란의 기독교 소수자를 지원했지만, 정치적 상황상 그 지원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처음에 그녀는 동방 교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주치의인 신자르의 가브리엘의 영향으로 안티오키아의 단성론파 교회, 즉 현재의 시리아 정교회로 옮겼는데, 가브리엘은 그녀의 불임을 고쳐 주었다.1 614년 602–628년 비잔티움–사산 전쟁 중 사산 왕조의 예루살렘 정복이 일어났고, 사산 왕조는 예수의 참된 십자가를 빼앗아 수도 크테시폰으로 가져갔으며, 쉬린은 그 십자가를 자신의 궁전에 두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쉬린은 페르시아 문학의 중요한 여주인공이 되었는데, 충실한 연인이자 아내의 모범으로 그려졌다. 그녀는 샤나메와 니자미 간자비(1141–1209)의 로맨스 서사시 *호스로와 쉬린*에 등장하며, 그 밖의 여러 작품에서도 언급된다. 문학 속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그녀의 생애에 관해 알려진 몇 안 되는 역사적 사실과 거의 또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그녀의 기독교 신앙과 남편이 암살된 뒤의 어려움, 그리고 호스로가 왕위를 되찾기 전 겪은 망명은 이야기의 일부로 남아 있다. 호스로가 그녀의 정체를 처음에는 알지 못한 채 우연히 처음 만난 뒤, 두 사람의 구애는 여러 굴곡을 거치며, 둘은 자주 떨어져 지내는데, 이 과정이 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호스로가 아들에게 살해된 뒤, 그 아들은 쉬린에게 자기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고, 그녀는 자살함으로써 이를 피했다.2
초기 생애
쉬린의 출신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는 이란계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7세기의 아르메니아 역사가 세베오스(661년 이후 사망)에 따르면, 그녀는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 출신이었다.3 그러나 두 개의 시리아 연대기는 그녀가 "아람인", 즉 아시리아 지역 출신이라고 기록한다.4 훨씬 뒤에 글을 쓴 페르시아 역사가 미르호반드(1498년 사망)는 그녀가 10대 시절 호스로 2세가 자주 방문하던 페르시아 가문의 하녀였다고 전한다.5 페르시아의 11세기 서사시 샤나메("왕들의 책")는 피르다우시(1019/1025년 사망)가 썼는데, 이 작품은 중세 페르시아어 텍스트 코다이나마그("군주들의 책")를 바탕으로 하며, 호스로 2세가 비잔티움 제국으로 도피했을 때 쉬린은 이미 그와 결혼한 상태였다고 말한다.3 이 기록들은 더 이른 시기의 자료로는 입증되지 않으며, 이것들이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이었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7세기 초의 비잔티움 역사가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타는 호스로 2세와 함께 도피한 두 여성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6
쉬린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는 전승은 틀린 것이며,7 후대에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4 그녀는 나중에 셀주크 투르크인으로도 묘사되었다.
결혼
쉬린을 언급한 가장 이른 자료는 에바그리우스 스콜라스티쿠스의 교회사로, 여기서 그녀는 "시라(Sira)"로 나온다. 이 책에는 호스로 2세가 레사파에 있는 성 세르기우스의 성소에 보낸 편지가 보존되어 있다. 592/593년으로 날짜가 기록된 편지에는 다음 구절이 있다:8
"내[호스로 2세]가 베라마이스에 있을 때, 거룩하신 분이여, 나는 당신이 나를 도와 주시고 시라가 임신하게 해 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시라는 기독교인이고 나는 이교도이며, 우리의 율법은 내가 기독교인 아내를 두는 것을 금하지만, 당신에 대한 나의 호의 때문에 나는 그녀에 관해서는 율법을 무시했고, 내 아내들 가운데 나는 언제나 그녀를 특별히 나의 사람으로 여겼으며 지금도 그렇게 여깁니다."9
"그리하여 나는 성자여, 당신의 선하심에 그녀가 임신하기를 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 청원을 서원과 함께 올렸는데, 시라가 임신하면 그녀가 지니고 있는 십자가를 당신의 존엄한 성소에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나와 시라는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그 십자가를 간직하고, 그 대신 그 가치로서 5천 스타테르를 보내기로 뜻을 정했는데, 그 가치는 사실 4천 4백 스타테르를 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청원과 뜻을 품은 때부터 로소코스론에 이를 때까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을 때, 성자여, 당신은 나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로 밤의 환상 속에서 내게 나타나셨고, 시라가 임신하리라고 세 번 말씀하셨으며, 같은 환상 속에서 나는 세 번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9
"그날 이후 시라는 여성의 정기적인 일을 겪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과 당신이 거룩하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이후로 여성의 정기적인 일을 겪지 않으리라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이 정황으로 나는 환상의 힘과 당신의 말씀의 진실함을 확신했고, 그래서 즉시 같은 십자가와 그 가치를 당신의 존엄한 성소에 보냈으며, 그 금액으로 신성한 신비를 위한 원반과 잔, 그리고 거룩한 식탁 위에 세울 십자가와 향로를 모두 금으로 만들어 달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금으로 장식한 훈 베일도 보냈습니다. 나머지 금액은 당신의 성소에 속하게 하여, 성자여, 당신의 행운으로 모든 일에서, 특히 이 청원에 관해서 당신이 나와 시라를 도와주시도록 하며, 당신의 중재로 이미 우리를 위해 마련된 것이 당신의 선하신 자비와 나와 시라의 바람에 따라 완성되게 하시고, 우리 둘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힘을 신뢰하고 계속 당신을 믿도록 하십시오."9
테오필락토스 시모카타는 추가 정보와 함께 비슷한 기록을 남긴다. "다음 해에 페르시아 왕[호스로 2세]은 로마 출신이며 기독교인이고 결혼 적령기의 꽃다운 나이인 세이렘[쉬린]을 왕비로 선포하고 그녀와 동침했다. ... 3년째 되던 해에 그는 페르시아에서 가장 효험 있는 세르기우스에게 세이렘과의 사이에 자식을 얻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이 이루어졌다."10
쉬린의 로마(비잔티움) 혈통은 저자 세베오스의 기록과 모순된다. "[호스로는] 그들의 마기교 신앙에 따라 많은 아내를 두었다. 그는 기독교인 아내도 맞이했는데, 그 가운데 후제스탄 땅 출신의 매우 아름다운 기독교인 아내 쉬린은 '밤비시', 즉 왕비 중의 왕비[tiknats' tikin]라고 불렸다. 그녀는 왕궁 근처에 수도원과 교회를 세우고, 사제와 부제들을 거기에 정착시켰으며, 궁정에서 그들에게 생활비와 의복비를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수도원에] 금과 은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고개를 높이 들고 궁정에서 왕국의 복음을 설교했으며, 대귀족 마기들 가운데 누구도 기독교인에 관해 크든 작든 아무 말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날이 지나고 그녀의 최후가 가까워지자, 기독교로 개종했던 많은 마기들이 여러 곳에서 순교당했다."11
후제스탄 연대기는 후제스탄 출신의 아시리아 기독교인이 680년경에 쓴 것으로 여겨지며, 아르메니아 작가 세베오스의 저작에 상응하는 시리아어 문헌으로 묘사된다. 이 연대기는 가톨리코스 이쇼 야브 2세와 페르시아 왕 호스로 2세 사이의 관계를 전한다. 파르베즈(590–628): "이쇼 야브는 평생 왕 자신과 그의 두 기독교인 아내, 아람인 쉬린과 로마인 마리아에게 존중받았다." (Theodor Nöldeke: Die von Guidi herausgegebene syrische Chronik, Wien 1893, p. 10)
세르트 연대기(시이르트)는 페르시아와 중동의 동방 교회가 쓴, 작자 미상의 역사 기록 문헌으로, 9세기 무렵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본문은 기독교회의 교회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다루며, 그 지도자와 주요 인물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LVIII. - 호르미즈드의 아들 호스로 파르베즈의 역사: "호스로는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여 교회들을 재건하고 기독교인들을 존경하라고 명했다. 그는 마리에(마르얌)를 위해 두 교회를 짓고, 베트 라슈파르 지방에 자기 아내 아람인 쉬린을 위한 큰 교회와 성채를 지었다."12 (Patrologia Orientalis, Tome VII. - Fascicule 2, Histoire Nestorienne (Chronique de Séert), Seconde Partie (1), publiée et traduite par Mgr Addai Scher, Paris 1911, Published Paris : Firmin-Didot 1950 p. 467.)
호스로는 사랑하는 쉬린의 이름을 따서 여러 도시를 세웠는데, 그중에는 '쉬린의 궁전'이라는 뜻의 현대 도시 카스르에 쉬린도 포함된다.
출처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