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
상앙(商鞅,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사상적인 면은 위(魏)의 이회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가작통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십오제(什伍制)를 만들었다. 또한,
출생~사망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3
문서 정보
- 출생 ~ 사망
-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
- 본명
- 희앙
- 출생
- 기원전 390년
- 사망
- 기원전 338년
- 성별
- 남성
- 국적
- 진나라
- 경력
- 좌서장, 대량조
- 직업
- 정치가
- 위치
- 35.7639, 115.0300
목차
상앙(商鞅, 기원전 390년 ~ 기원전 338년)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진나라의 법가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 상나라를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성(姓)은 희(姬), 씨(氏)는 공손(公孫), 이름은 앙(鞅)이다. 또 다른 별칭으로 위나라 공족(公族)출신이라서 위앙(衛鞅)이라 불렸다.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거열형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사상적인 면은 위(魏)의 이회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가작통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십오제(什伍制)를 만들었다. 또한, 동양 최초로 노예 제도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하였다.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대량조(大良造)로 승진하여 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 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진나라를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1 저서로는 《상군서》(商君書) 29편이 있으며, 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공손앙》(公孫鞅) 27편을 짓기도 했다.
생애
생애 초기
기원전 395년에 위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연대는 다소 불확실하여 기원전 396년생 설과 기원전 390년생 설도 있다. 그의 가계는 주나라 왕족과 위나라 공족의 후예였으며, 진 효공의 지원으로 그의 법철학에 따르는 여러 가지 개혁을 실행하였다. 병제, 세제, 법제를 정비하고 토지제도와 군현제를 시행하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그것은 진나라가 주변국에서 군사강국인 중앙집권 국가로 변화시켰다. 행정을 교육제도에 중점을 두어 변화시키고 귀족의 권력을 줄였다. 그렇게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으며, 그 공적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지고 상(商: 陜西省 商縣)을 봉토로 받으면서 “상앙”이라 불렸다.
사상
『상군서』에 따르면, 상앙은 인간의 의식과 인식 전반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신농과 같은, 추앙받는 성인조차도 모두 과거 생산력과 인력에 국한되는, 한정된 정치성을 갖고 있기에 이들의 정치를 본받아서는 안 되며, 현재(당시 전국시대 초기 당시)의 정치는 현재의 인력과 생산력의 규모에 초점을 맞춰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현재의 정치도 미래에서는 충분히 낙후된 것일 수 있기에, 새로운 법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창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秦)의 변법
상앙이 추진했던 변법은 당시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였으며, 강력한 부국강병을 원했던 진 효공과 뜻이 맞아 이를 실행할 수 있었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계획 경제: 정부가 직접 철광과 관개수로 개발을 주도하여 다방면에서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으며, 상평제도를 통한 농축산물의 가격 안정을 꾀하였다.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상앙」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r38518030)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원문 기여자 목록은 원문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3 · r32777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