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사건
1974년 4월 유신 정권이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공산 정권 수립을 위한 국가 변란을 꾀했다며 1,024명을 조사하고 180여 명을 구속·기소한 사건.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학생운동 탄압 사건으로 규정했고, 2009년 이후 재심에서 무죄가 잇따랐다.
시작~종료 1974년 4월 3일 ~ 2013년 1월 4일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12:04
상세 타임라인
개요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은 1974년 4월 3일 전국 대학의 동시 유신 반대 시위 계획이 알려지자, 박정희 정부가 같은 날 밤 대통령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고 시위를 준비한 학생들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아 대거 처벌한 사건이다. '민청학련'은 학생들이 유인물에 붙인 이름에 가까웠지만, 중앙정보부는 이를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는 조직으로 규정했다. 1,024명이 조사를 받았고 180여 명이 구속·기소되어 비상군법회의에서 사형·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수사에서 배후로 지목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 관련자 8명은 1975년 사형되었다.
배경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저항이 커지는 가운데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이 드러나고 10월부터 대학가 시위가 본격화했다. 정부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대학별로 흩어져 있던 시위를 전국적으로 묶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서울대 등 여러 대학 학생들이 4월 3일 일제 시위를 준비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과
- 긴급조치 4호(1974년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민청학련이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아 인민혁명을 꾀한다고 주장하고, 민청학련 관련 활동과 학생들의 수업 거부·집단행동을 금지했다.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구속·수색할 수 있고 비상군법회의에서 최고 사형까지 처벌할 수 있었다.
- 수사 발표(1974년 4월 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정부 전복을 꾀한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 조직과 조총련, 일본공산당, 혁신계 좌파가 있다고 발표했다. 1,024명이 영장 없이 연행·조사되었고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송치되었다.
- 기소(1974년 5월 27일):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추가 발표에서 1차로 54명을 기소했다고 밝혔고, 최종 기소자는 180여 명이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김찬국 교수 등 종교인·재야인사도 학생들에게 자금을 주거나 시위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와 하야카와 요시하루도 체포되었다.
재판
1974년 7월 13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는 이철·유인태 등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 20년, 6명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학생들이 인혁당 조직원 여정남에게 포섭되어 6개 도시 40여 개 대학을 망라한 조직을 만들고 4월 3일 일제히 봉기해 국가 변란을 꾀했다고 판단했다. 7월 15일에는 일본인 2명에게도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시인 김지하도 이 사건과 관련해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었다. 학생들의 사형은 집행되지 않았다.
석방
국내외 비판이 커지자 정부는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등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련자를 형 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일본인 관계자의 체포와 재판은 한때 한일 간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진상 규명과 재심
- 국정원 과거사위원회(2005년 1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민청학련 사건을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공산주의자의 배후 조종을 받은 인민혁명 시도'로 왜곡한 학생운동 탄압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 재심: 2007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판결은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국가 전복이 아니라 유신 타파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활동했다고 언급했고, 이후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가 이어졌다. 2009년 9월 법원은 관련자들에게 내란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2010년 1월 28일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 2010년 9월 30일 이철, 2010년 11월 25일 강창일, 2011년 2월 25일 고 제정구, 2011년 7월 21일 이원희 등이 차례로 무죄를 받았다. 초기 재심에서는 긴급조치 위반 부분에 대해 법령이 실효되었다는 이유로 면소를 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 긴급조치의 위헌 판단: 2010년 12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긴급조치 1호가 위헌·무효라고 판단했다. 2013년 1월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1부는 김지하 재심에서 긴급조치 4호가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해 무효라고 보고 긴급조치 위반·국가보안법 위반·내란선동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1970년 시 「오적」 관련 반공법 혐의는 선고유예).
- 배상: 2010년 10월 법원은 피해자들에게 모두 520여억 원의 국가배상을 판결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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