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타이
만타이(滿泰, ᠮᠠᠨ᠋ᡨ᠋ᠠᡳ Mantai,?-1596)는 울라나라씨(烏拉那拉氏)로, 해서여진(海西女眞) 울라(Ula, 烏拉) 제3대 수장이다. 전임 수장 부간(Bugan, 布干)의 차남으로, 재위 기간 동안 울라가 하다(Hada, 哈達)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였고, 수완(Suwan, 蘇完)과 시버(Sibe, 錫伯) 두 부를 잇달아 병탄하는 등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후 군대를 파견하여 여허(Yehe, 葉赫)를 수장으로 하는 구부(九部) 연합군에 참가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과 구러산(gure i alin, 古勒山)에서 격전을 벌였지만
출생~사망 연도 미상 ~ 1596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18
**만타이(滿泰, ᠮᠠᠨ᠋ᡨ᠋ᠠᡳ Mantai1,?-1596)**는 울라나라씨(烏拉那拉氏)로, 해서여진(海西女眞) 울라(Ula, 烏拉) 제3대 수장이다. 전임 수장 부간(Bugan, 布干)의 차남으로, 재위 기간 동안 울라가 하다(Hada, 哈達)의 지배를 벗어나게 하였고, 수완(Suwan, 蘇完)과 시버(Sibe, 錫伯) 두 부를 잇달아 병탄하는 등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후 군대를 파견하여 여허(Yehe, 葉赫)를 수장으로 하는 구부(九部) 연합군에 참가하여 건주여진(建州女眞)과 구러산(gure i alin, 古勒山)에서 격전을 벌였지만 동생 부잔타이(Bujantai, 布占泰)가 생포되었다.(구러산 전투) 몇 년 후 변방 순시 중 습격을 받아 숨졌다.
생애
만타이는 즉위 후 완한(Wan han, 萬汗) 왕타이(王台)가 사망하면서 하다가 쇠락하고 세 아들이 왕위 쟁탈을 벌이게 되었다. 이를 틈타 만타이는 하다로부터 벗어났다. 만타이는 또한 남쪽으로 진격하여 여허와 연합한 후, 수완과 시버 두 부를 분할하였으며 원래 울라에 속한 수이하성(綏哈城)을 탈환하였다. 수완 수장 솔고(索爾果)와 아들 피옹돈(費英東) 등이 남쪽으로 가서 건주여진에 항복하였고,2 시버 수장은 여허에 투항하였다.3 만타이는 울라로 도주한 왕타이의 오남 멍거불루(Menggebulu, 孟格布祿)가 하다로 돌아가 즉위하는 것을 지지하였으며, 자신의 동생 부잔타이를 파견하여 여허와 호이파(Hoifa, 輝發)의 분쟁을 조정하는 것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만타이는 울라의 명성이 크게 떨치게 하였고, 또한 왕타이의 뒤를 이어 새롭게 해서여진(海西女眞)의 맹주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여허의 힘이 더욱 커졌고 배후에는 명(明)의 지지를 받고 있어, 만타이는 여허의 맹주 지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4 1593년 가을, 만타이는 자신의 영역 내 정국이 볼안해 짐에 따라 동생 부잔타이를 대신 출정시켰다. 만타이는 부잔타이에게 군사 3천명을 거느리게 하고 여허가 중심이 되는 구부(九部) 연합군 군사 작전에 참여하게 하였다. 구부 연합군은 (Nurhaci, 努爾哈赤)의 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으나, 연합군은 대패하였고 맹주 여허버일러 (布寨)는 살해되었으며 부잔타이는 생포되었다. 이로 인해 만타이는 두려움을 느끼고, 다시는 여허가 건주를 상대로 벌이는 군사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만타이는 건주여진에 예물을 후하게 주고 부잔타이를 되돌려 받고자 하였으나 누르하치는 거절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만타이는 태도를 바꿔 누르하치와 우호를 맺기로 하였고, 1596년 만타이는 부잔타이 가족 20여 명을 건주로 압송하여 부잔타이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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