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춘추)
관이오(管夷吾,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는 중국 춘추 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仲)이며 영상(潁上) 사람이다.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상은 한서 예문지에서는 도가로, 수서 경적지에서는 법가로 분류되나, 이는 직하하파에 의해 편집된 관자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의 사상이 후대의 제자백가에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저서로는 《관자》가 있으나, 후학에 의해 가필된 것으로 보인
출생~사망 기원전 720년 ~ 기원전 645년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08
관이오(管夷吾, 기원전 725년? ~ 기원전 645년)는 중국 춘추 시대 초기 제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仲)이며 영상(潁上) 사람이다. 보통 성씨와 자를 합쳐 관중(管仲)으로 불리며, 제환공을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사상은 한서 예문지에서는 도가로, 수서 경적지에서는 법가로 분류되나, 이는 직하하파에 의해 편집된 관자를 후대의 관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중의 사상이 후대의 제자백가에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저서로는 《관자》가 있으나, 후학에 의해 가필된 것으로 보인다.
생애
청년기
관중은 기원전 725년 제나라 영상(현재 안휘성 복양시 영상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상은 영수 근처에 위치한 상업의 중심지로, 수운을 통해 교류하기 쉬운 곳이다. 경제를 중요시 했던 관중의 사상은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젊은 시절 포숙과 함께 지냈으며, 널리 알려져 있는 “관포지교”의 기록 외에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출신지인 영상의 특성과 관포지교의 내용 중 상업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관중과 포숙은 각각 제나라의 공자인 규와 소백을 모셨다. 제 양공이 관지보와 연칭에게 시해당하고 제나라의 군주 자리가 공석이 되자, 관중과 포숙은 각기 규와 소백을 모시고 제나라를 향했다.중간에 관중이 소백을 죽이기 위해 배에 화살을 쏘자 , 소백이 쓰러졌다.하지만 소백은 허리띠에 있는 쇠고리에 화살을 맞았을 뿐 멀쩡했다. 소백이 먼저 제나라에 들어와 고혜와 국씨의 도움으로 제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제 환공이다. 관중이 모시던 규가 죽고, 노나라로 망명했던 자신 역시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나, 포숙의 천거로 그는 하루아침에 제나라의 재상에 오르게 된다. 그는 환공을 도와 제나라의 국력을 키웠다.
관료시절
관중이 제 환공에게 중용되어 재상이 되었을 때는 기원전 686년.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주 왕실의 통제력을 갈수록 약해지고 제(齊), 초(楚), 진(晉), 진(秦), 연(燕), 노(魯) 등을 비롯한 제후국(諸侯國)들이 차츰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국의 실리를 취하며 군웅할거하던 시절이다.
관중이 재상이 된 후 기원전 681년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화의를 하던 과정에서 노나라의 장수 조말이 단도로 제환공을 위협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조말은 제나라에서 가져갈 노나라 영토를 돌려달라고 했고, 위협에 못이긴 제환공은 그러겠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영토를 돌려주지 않고 그를 죽이려 했다. 관중은 제 환공을 말리며 군주가 한번 뱉은 말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제후도 이후에 제나라를 믿고 따르지 못할 것이라며 “신의”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노나라의 영토는 다시 돌려줬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제환공의 명성은 중원에 퍼졌다.
제환공 재위 7년(기원전 679년)에 위(衛)의 견(甄)에서 회맹을 열고 패자의 지위에 오른다.
사망
제환공 재위 41년 (기원전 645년)에 관중이 병이 나자 환공이 물었다.
- "뭇 신하들 가운데 재상을 시킬 만한 이는 누구인가?" 관중이 말했다."임금보다 더 신하를 잘 알 사람은 없지요." 환공이 물었다. "역아(易牙)는 어떤가?" "제 자식을 죽여 임금에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안 됩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개방(開方)은 어떤가?" "부모를 배반하고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환공이 다시 물었다. "수도(豎刀)는 어떤가?" "제 생식기를 갈라 임금에게 영합했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친애하기 어렵습니다." 관중이 죽고 나자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이 세 사람을 가까이 두어 중용했고, 이리하여 이들 세 사람이 정권을 전횡하게 되었다.
이 문서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관중 (춘추)」 문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r36913191)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원문 기여자 목록은 원문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수정 2026. 10. 15. 오후 2:08 · r7427 · 문서 내용은 CC BY-SA 4.0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