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의문사 사건
사건 · 정치·외교 · 1975년 8월 17일 ~ 2013년 3월 26일 · 38.0400, 127.4000
1975년 8월 17일 재야 지도자 장준하가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 당국은 하산 중 실족사로 결론지었으나 의문이 계속 제기되었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상세 타임라인
개요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1975년 8월 17일 광복군 출신 언론인이자 유신 반대 운동을 이끌던 재야 지도자 장준하(당시 57세)가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 일대에서 등산 도중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하산 중 절벽에서 떨어진 실족사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부검이 없었고 유일한 목격자의 진술 외에 확인된 사실이 적다는 점에서 타살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조사 끝에 2004년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고, 사인은 공식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배경
장준하는 잡지 『사상계』를 발행하고 1967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0월 유신 이후 1973년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였다.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같은 해 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사망 당시 그는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의 핵심 인물로 정보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경과
사망과 1975년 수사
1975년 8월 17일 장준하는 호림산악회 회원 수십 명과 함께 포천 약사봉에 올랐다가, 오후 약사계곡 쪽 절벽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함께 있었다는 김용환은 하산 길에 그가 앞서가다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진술했다. 그날 밤 의정부지청 검사와 검안의가 현장을 검안했는데, 검안의는 오른쪽 귀 뒤쪽 머리뼈의 함몰 골절을 추락으로 생긴 상처로 보았다. 부검은 실시되지 않았고 검찰은 다음 날 실족에 의한 추락사로 사건을 종결하였다. 당시 경찰은 수사에서 배제되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사건 기록을 복사해 갔다는 증언이 뒤에 나왔다. 의혹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자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조사 요구
1988년 의정부지청이 재수사를 지시했으나 새로운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1993년 3월 민주당 진상조사위원회는 75도 경사의 절벽에서 떨어졌다면 다른 부위에 상처가 거의 없는 점, 안경과 보온병이 깨지지 않은 점, 어깨의 멍 등을 의문점으로 지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였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판단
의문사위는 1기(2000~2002)와 2기(2003~2004)에 걸쳐 이 사건을 조사하였다. 위원회는 모의 실험 결과 그런 머리뼈 골절은 대개 다른 외상을 동반한다는 점과 서울대 법의학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장준하가 지목된 지점에서 추락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관련 기록을 제출하지 않았고 국가정보원은 더 이상의 자료가 없다고 밝혀, 2004년 6월 28일 최종적으로 '진상 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위원회 스스로 확인한 의문점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012~2013년 유골 감식
2012년 여름 경기도 파주 광탄면의 묘소가 폭우로 손상되자 유족은 8월 1일 유해를 파주 탄현면의 장준하 공원으로 옮겼다. 이 과정에서 머리뼈 뒤쪽에 지름 5~6cm가량의 둥근 함몰이 확인되었다. 이는 1975년 검안 기록에 있던 골절과 같은 것이어서 새 증거라기보다는 기존 기록을 실물로 확인한 의미가 컸다.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는 재조사를 요구했고, 2012년 말 여러 단체와 정당이 함께 진상 조사 위원회를 꾸렸다. 2013년 3월 26일 이 위원회의 의뢰로 감식을 맡은 서울대 법의학 교수 이정빈은 장준하가 머리를 무언가에 가격당한 뒤 떨어졌다는 소견을 발표하였다. 반면 2012년 유골을 처음 살펴본 서울대 법의학 교수 이윤성은 함몰 흔적이 한 곳뿐이고 도구를 특정하기 어렵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이설·논쟁
- 실족 추락사: 1975년 검찰의 공식 결론. 동행자 김용환의 진술과 당시 검안 소견에 근거한다.
- 타살 후 추락: 유족과 장준하기념사업회, 1993년 민주당 진상조사위의 의문 제기, 2013년 이정빈 교수의 감식 소견 등이 이 견해를 뒷받침한다. 다만 누가 어떻게 관여했는지를 밝힌 공적 조사 결과는 없다.
- 판단 불가: 2004년 의문사위 결정. 결정적인 정보기관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관련 재심
사망 사건과 별개로, 장준하가 19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받은 유죄 판결은 2013년 1월 24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긴급조치를 위헌·무효로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영향과 의의
이 사건은 1970년대 유신 체제 아래 재야 인사의 죽음을 둘러싼 대표적 의문사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설치를 요구한 배경 가운데 하나였다. 조사 기관이 정보기관 기록에 접근하지 못하면 진상 규명이 한계에 부딪힌다는 점을 보여 준 사례로도 자주 언급된다.